[논설위원이 만났습니다] 이석행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 이석행 이사장은 "한국폴리텍대학은 실용주의, 실사구시의 대학"이라고 말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낙하산도 여러가지]
'운동권' 최고참, 보은인사 시비
정부 경영평가 'A' 성과로 입증
'기름밥' 경력도 경영에 큰 도움

[길 잃은 청년 하이테크 무장]
4년제 졸업 후 'U턴' 학생 56%
지역서 투자하면 '맞춤형 양성'
남인천캠퍼스는 항공정비 특화


며칠 전 길을 가다 한 옥외광고판에 눈길이 멎었다. 취풍당당. '위풍당당이겠지' 하며 다시 보니한국폴리텍대학 광고였다. 그제서야 '취풍(就風·취업바람)'이 이해됐다.

대졸 청년 3명 중에 한 명이 백수라는 청년 취업난 시대. 길을 잃은 청년들이 다시 찾는 대학이 있다. 인천 부평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36개 캠퍼스를 열고 있는 한국폴리텍대학이다.

지난 주 이석행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10여년 전 민주노총위원장까지 지낸 투사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노조위원장을 시작했으니 '운동 짬밥'으로 치면 '최고참'이라고 한다.

이때문에 현 정부에서 폴리텍대학 이사장으로 낙점되자 한동안 시빗거리가 됐다. 전형적인 비전문가 낙하산·보은 인사라는 거였다.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노동위원회 위원장 출신이기도 하다.

그런 시각이 틀렸다는 것을 성과로 입증하는 수 밖에 없었다. 폴리텍대학은 2018년 정부 경영평가에서 A등급을 받았다. A등급의 이유는 직업교육의 혁신, 조직 일체감 형성 등이다.

만나보니 '투사' 이미지와는 좀 멀었다. 말과 표정이 부드러웠고 동네 세탁소 주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말에 막힘이 없었다. 그냥 입만 발달한 달변가와는 또 달랐다. 오랜 산업현장 경험이 말에 힘을 보태고 있는 듯 했다. 공공 직업교육기관은 고고한 상아탑과는 다르다.

"기술과 땀은 정직합니다." "우리 폴리텍은 기술의 가치와 땀의 가치를 구현하는 실사구시, 실용의 대학입니다."

맞는 말이다. 기술이야말로 산업사회 실용주의의 표상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제대로 찾은 것 같다"고 했다. 10대 때부터 시작된 '기름밥' 경력과 오랜 조직활동의 경험이 폴리텍대학 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1978년 전북기계공고를 졸업하고 바로 대동중공업에서 일을 시작했다. 1970년대의 국립기계공고는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학생들이 가는 학교였다. 선반정밀가공사와 제도기능사가 그의 첫 직업 자격증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자격증을 목표로 배운 기술과 현장의 그 것과는 딴판이었다. 이미 그 때부터 우리 직업교육의 허실을 체험한 셈이다. 그는 남다른 현장 적응력 덕분에 공정 개선에까지 실력을 발휘했다. 그 기술들로 그는 155밀리 자주포와 국산 미사일 생산에도 종사했다.

입사 6년차에 회사 노조위원장이 됐다. 그는 "별다른 의식은 없었다. 일요일만이라도 좀 쉴 수 있었으면 하는 정도였다"고 했다.

인천과의 인연도 노동운동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초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자주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인천에 살던 누나집 신세를 지면서 눌러앉게 됐다.

그래서 인천에 대한 애정도 깊다. "폴리텍대학 본산이 있는데도 인천은 이를 활용할 줄을 모른다"고 했다.

인천이 'MRO(항공정비산업) 유치'를 외치지만 정부만 바라본다고 했다. MRO야말로 숙련 기술력을 먼저 갖춰야 하는 산업이라는 것이다.

폴리텍대학은 올해부터 주안에 있는 남인천캠퍼스를 항공 MRO 특화캠퍼스로 구축하는 사업에 들어갔다. 여기서 기체 중정비, 엔진 중정비, 부품 중정비, 운항 정비 분야의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다.

화제가 청년 취업난으로 흘렀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폴리텍에 투자하면 청년실업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국가가 많이 투자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니 싱가폴과 독일 얘기를 했다. 돈도 돈이지만 우리는 시스템이 뒤떨어져 있다고 했다. 싱가폴과 독일 등에서는 지역 상공회의소와 노동조합까지 기술인력 양성에 참여한다고 했다.

즉 기술 배울 학생들을 선정해 교육을 의뢰하면 폴리텍대학은 맞춤 기술을 가르쳐 내보낸다. 폴리텍대학이 산업현장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싱가폴은 작은 도시국가임에도 5개 폴리텍대학 입학 정원이 9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청년실업 해결'이 장담만은 아니라고도 했다. "현재 대학을 졸업하거나 다니다가 다시 폴리텍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이 56%에 이른다"고 했다. 폴리텍대학에서는 이를 'U턴 비율'이라고 부른다.

특히 하이테크 과정에는 거의 대부분이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이다. 융복합기술교육원에는 이른바 S.K.Y 대학 출신자들도 많다고 한다. "취업절벽에 좌절해 있는 이들 청년들을 하이테크 기술로 무장시키는 것이 폴리텍대학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정한 한국 직업교육 쇄신의 방향은 이렇다. '뿌리 기술은 더 튼튼하게, 신산업 기술은 더 앞서게' 흔히들 도금을 흘러간 기술로 알지만 그는 대표적인 뿌리 기술이라고 했다. 인천이 가야 할 MRO에도 초정밀 도금기술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취임 초부터 그가 야심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 '러닝 팩토리'다. 과거처럼 가공, 절삭 등 단순기술로는 4차산업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러닝 팩토리에서는 설계에서부터 소재-금형-주물-완제품 생산의 프로세스를 한꺼번에 가르치고 익힌다. 개별 기술들 사이에 쳐진 칸막이를 걷어내는 것이다.

지역·산업 맞춤형 교육도 시작했다. SK이노베이션이나 하나은행, 한국전력, 광주형 일자리 사업 등과 MOU를 맺고 현장에서 바로 쓰일 수 있는 인력들을 양성하는 사업이다.

4차산업시대에 맞는 혁신을 위해서는 학과 통폐합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는 교수진의 반발에 부닥친다.
지난 1년 반 동안 그는 전국 36개 캠퍼스를 3차례나 돌았다. "같이 고민하자"며 통폐합 대상 학과의 교수들과 밤샘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그는 "오랜 조직활동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낙하산도 여러 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에 찬 말솜씨에 인터뷰어가 넘어간 건가.

/정기환 논설위원 chung783@incheonilbo.com


▶한국폴리텍대학은

산업화 초기, 기능인력 양성의 산실이었던 공공직업훈련원이 그 전신이다. 당시 한국은 '수출입국'을 내걸고 산업화에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숙련된 기능인력이 부족했다. 이에 1968년 국립 중앙직업훈련원(현 한국폴리텍Ⅱ대학), 1973년 정수직업훈련원(한 한국폴리텍Ⅰ대학) 등 전국에 공공직업훈련원을 잇따라 설립했다. 외국으로부터 받은 차관을 기능인재 양성에 투자한 것이다.

공공직업훈련원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국제기능올림픽에서도 큰 성과를 일궈냈다. 1977년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거둔 이래 1997년 대회까지 국제기능올림픽 역사상 유례 없는 11회 제패의 기록을 세웠다.

1997년에는 학교법인 기능대학이 설립돼 전국의 기능대학들을 인수했다. 이어 2008년에 학교법인 한국폴리텍대학으로 재출범했다.

현재 전국에 36개의 캠퍼스를 두고 있다. 개설학과는 컴퓨터응용기계과, 메카트로닉스과, 산업디자인과, 정보통신시스템과, 바이오생명정보과, 항공정비과 등 17개 계열에 245개 학과이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에 부응, 융합형 기술인재 양성을 위한 선도적인 직업교육기관으로 도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