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행적 사용 '마쓰시마'에서 흘러나온 것"
▲ 1937년 수인선 안내도.
▲ 1937년 수인선 안내도.
▲ 1937년 발간된 '경승의인천' 송도지역
▲ 1937년 발간된 '경승의인천' 송도지역
▲ 문학면 지지 조서 중 옥련리 인구.
▲ 문학면 지지 조서 중 옥련리 인구.
▲ 문학면 지지 조서 중 문학면 부도.
▲ 문학면 지지 조서 중 문학면 부도.

 

1994년 송도 해상 신도시 사업이 닻을 올렸다. 여의도 면적의 6배 규모로 지금껏 매립이 한창이다. 송도는 더 이상 어촌마을이 아니요, 얄팍했던 관광지 또한 사라졌다. 이곳은 현재 인천을 넘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 '송도(松島)', 이곳 송도에 얽힌 사연과 속내는 아직 묶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우린 송도에서 삶을 잇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논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게 있다. 바로 송도가 커가는 과정, 삶이 담긴 사람 이야기 등으로, 반드시 조명해야 한다. 이에 인천일보와 인천시립박물관 도시역사관은 공동으로 '없었던 섬, 송도'에 관한 기획을 준비하게 됐다. 두 기관은 송도의 공간적 이야기를 풀어가고, 사람 이야기를 공동으로 취재, 발굴할 방침이다. 이 기획은 인천일보 창간 31주년을 맞은 7월15일부터 매 격주 게재된다. 이번은 첫 회로 '송도'라 불리던 곳의 범위를 찾아보고, 송도로 덧씌워지기 전의 옛 지명과 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피를 빨아들이는 악마굴'로 묘사됐다. 일제는 수탈이라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몹쓸 '강탈'을 서슴없이 해 나갔다. 인천항은 '개항'이란 명분으로 강제로 뜯겨졌고, 인천항에서는 반만년 악착같이 살았던 민초의 고혈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응봉산은 일본의 놀이동산으로 전락했고, 월미도는 조탕이 건설돼 흥청망청 망국의 설움을 겪었다.

그렇게 천민 자본이 스멀스멀 인천에 스며들었고, 식민지 인천에 고향 '일본'을 심어갔다. 조금씩 인천은 일본화 됐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강제로 붙여진 일본 지명을 상당부분 회복했지만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몇 곳은 정체가 불분명한 지명이 박혀 있다.

'송도' 지명 논란은 진행형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얽힌 송도 이야기가 충분한 공감대를 통해야만 송도 지명 논란은 사그러들 수 있다. 이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송도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과연 송도는 어느 곳일까,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을 옛 사람들의 체취는 남아있을까. '송도'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진짜 송도 찾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송도'.
소나무 섬이란 한자 표현이다. 인천은 두 곳의 송도가 있다. 연수구 전쟁기념관 인근 유흥가로 개발된 '구송도'와 마천루가 뻗어 있는 '신송도'이다. '송도'란 지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불과 100년이 안 된다. 맨 처음 누가, 어떻게, 왜 '송도'라 불렀는지는 모른다. 다만 1936년 '송도'란 지명이 정식 명칭으로 고착화되기 이전부터 송도라고 쓰였다.

인천도시역사관은 오는 10월6일까지 '없었던 섬, 송도 에피소드 1. 송도 일대기:욕망, 섬을 만들다' 기획특별전을 진행한다.

기획특별전을 관통하는 문구는 이렇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두 군데의 송도가 존재합니다. 기차역과 유원지가 있었던 과거의 송도와 국제도시로 꾸며진 지금의 송도가 그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송도라는 이름이 인천에 등장한 것은 불과 100년이 채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송도라는 이름을 유원지와 기차역에 그리고 바다를 메워 만든 신도시에 붙게 한 것은 자본과 땅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일 것입니다. 자본과 땅에 대한 욕망에 이어 우리는 또 어떤 욕망에 집중해야 비로소 살만 한 도시 송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두 곳에서 공존하는 송도는 송도국제도시인 송도동 전체와 구송도라 칭해지는 옥련동, 동춘동 일부로 구분된다. 동춘동 중 연수구 앵고개를 기준으로 옥련동 방향쪽이 구송도로 불린다.

▲옥골, 독바위, 한나루, 큰앰 그리고 능허대

송도라 불리기 전 이곳은 어디였을까.
현 송도동은 바다였다. 송도국제도시 생일은 1994년 9월10일이다. 이날 송도 앞바다에서 '인천 송도 해상 신도시' 기공식이 거행됐다. 당시 예상 매립 면적은 약 1765만5000㎡(약 535만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6배 규모였다. 당시 투입 예산은 약 1조7424억 원으로, 시 1년 치 세수를 훌쩍 넘는 규모였다.
1994년 인천시 통계연보는 시 세수를 1조1563억 원, 인구 214만 명으로 분석했다.
송도 해상 신도시 사업 기공식 때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하는 등 국가대사로 인식됐다.
과거 송도는 옥골(玉洞), 독바위(瓮巖), 한나루(漢津), 큰앰(大岩)이라 칭했다. 조선 때 인천도후부 먼우금면(遠又今面)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로 바뀌었다.

1915년 만들어진 '문학면 지지조서'에는 당시 옥련리 인구표가 나온다. 그 때 옥골에는 21호 109명, 독바위에는 46호 260명, 한나루에는 24호 116명, 큰앰에는 37호 203명이 살았다.
능허대 역시 송도라는 지명에 희석됐다.

능허대는 옥련동 해안가 바다를 향해 솟아있는 평평하고 너른 바위를 부르는 말이다. 능허대는 백제의 사신이 중국으로 출발할 때, 환송했던 장소라 전해진다.

길게 뻗은 백사장에 석양이 아름다워 조선시대 인천의 대표적인 명승지였던 능허대,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능허대 대신 송도로 불리게 된다.
옛부터 능허대는 문학산과 함께 인천의 중요한 장소로 인식됐다. 박진한의 '개항 이후 인천의 장소인식 변화와 일제강점기 새로운 명소의 등장'(도시연구, 20호 2018년)에 따르면 양반 문인의 입장에서 능허대는 광활한 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현실세상의 속념을 쫓거나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찬 진세(塵世)를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우현 고유섭은 1930년대 능허대를 "인천의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모래섬이나 (중략) 이 조그만 반도 같은 섬에는 풀도 나무도 바위도 멋있게 어우러져 있고 흰 모래가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깔려 있다"고 했다. 또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는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신비와 숭엄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송도, 마쓰시마 그리고 쇼토

정감있던 동네 이름에 '마쓰시마(송도)'가 덧칠된 것이다.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인천 지도에도 없던 '송도'는 1926년12월16일 매일신보의 '경인간의 별천지 송도'란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 기사는 "백사청송의 절경지로 저명한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 해안의 속칭 송도는 인천을 거하기 2리 내외에 위한 터이나…"로 시작된다. 이어 1926년 12월18일 중외일보에도 송도는 지명이 아닌 당시 세간에 불리운 명칭으로 다뤄진다.

역사서 저술가 이순우씨는 "원래 우리나라에 숱하게 존재했던 송도(일본식 발음 쇼토)라는 지명에서 따온 명명방식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관행적으로 많이 사용하던 '송도', 즉 '마쓰시마'의 용법에서 흘러온 것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고 했다. '마쓰시마(송도)'는 일본 미야기 현 중부 센다이만 연안에 산재한 크고 작은 260여 개의 섬들을 총칭하는 지명으로, 일본삼경의 하나로 꼽힌다.
송도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나타난다.

1936년 3월5일자 매일신문을 통해 인천의 송도유원지 탄생 배경을 알 수 있고, 1913년 전남 목포부 목포면 송도정 외 12정의 도면이 남아 있다. 부산 송도의 해수욕장은 1930년대 한반도 최고의 휴양지였고, 포항 동빈내항 송도의 옛 정취가 사진에 담겨 있다. 여기에 1928년 북한 청진부 송도정 2번지의 2지선 부잔교 설치의 건에 관한 공문서를 통해 청진에도 송도가 뿌리내렸음이 확인된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oenilbo.com

<인천일보·인천도시역사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