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수양, 문자예술의 한 획을 긋다
▲ 박재교 장인./사진제공=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

 

▲ 박재교 장인의 서예작품.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박재교 장인의 전각작품.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붓 잡은지 30년 그 시작은
군복무 중 장교들 작업모습에 반해
"연습만이 살길" 반년간 가로긋기만

배움보단 인성이 우선
개업한 교습소 제자들과 병동봉사
나만의 필법·가치관 구축법 가르쳐

시에서 손꼽는 명인으로
포천시민의날 서예 퍼포먼스 선봬
전각예술·캘리까지 활동영역 넓혀

한 획에 수양을 하고 또 한 획에는 성찰을 담았다. 화선지 위로 묵향이 짙게 깔리면 먹의 농담과 어우러진 문자들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다. 독특한 자신만의 필법을 구사하며 예술관을 구축해 온 문자예술가 박재교(61) 장인을 5일 만났다.

#서예의 기본

아이 머리통만한 붓을 들고 장장 5m 너비 화선지를 가로지르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난해 박재교 장인이 제16회 포천시민의 날을 맞아 선보인 대평 붓 서예 퍼포먼스에 시민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비상(飛上)이라 새긴 두 글자에 박 장인은 온 힘을 실었다.

"포천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포천시로부터 의미있는 제안을 받고 시민의 날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20호나 되는 붓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어 직접 제작을 했죠. '비상하는 포천'의 슬로건에 맞춰 비상이라는 두 글자를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인 만큼 사명감으로 임했습니다."

그가 붓을 잡은 지 올해로 30년째. 수양의 예술이라 불리는 서예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숱한 노력이 따랐다.

박 장인이 처음 서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군 입대를 하고 나서다. 육군대학에 자대 배치를 받고 군복무를 하던 시기, 종종 장교들의 서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그는 필히 제대하면 서예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전역 후, 우연히 여동생 집에 뒹굴던 문방사우가 눈에 띄었다. 그날로 하루 4시간씩 꼬박 6개월을 '가로긋기'만 연습했다.

"어려운 형편에 교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서점에 놓인 서예 이론서를 보며 눈동냥으로 익힌 것이 전부였고 오로지 연습만이 살길이다 싶어 6개월간 서예의 기본 중의 기본인 가로긋기를 연습했지요. 이 가로긋기만 6개월 매달리니 서예의 본질이 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날부로 겁도 없이 군 생활을 하던 경남 진해에서 고향인 포천으로 올라와 서실을 차리게 됐습니다."

박 장인은 1988년 되던 해, 서예교습소 문을 열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교습소는 서예를 배우겠다는 수강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박 장인만의 특별한 교수법이 이들을 서실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인기 서실의 비결

"기본기부터 다져야 합니다. 저 역시 작대기 긋는 것만 하루 꼬박 4시간 씩 6개월을 했으니까요. 서예의 변천 과정을 알고부터는 기본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전서, 소전, 대전과 같은 아주 기초 중에 기초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또 한 가지, 그에겐 서예를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서예를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인성 교육입니다. 잘못을 할 때는 회초리를 듭니다. 그렇다고 잘하는 아이를 마냥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자칫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삼일절, 현충일과 같은 국경일에는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해주기 위한 현장학습을 진행했습니다."

그의 서실 운영 방법은 아이들과 부모 모두를 만족시킬 수 밖에 없었다.
박 장인은 독특한 자신만의 필법과 예술 가치관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서예가가 갖춰야 할 우선순위 덕목으로 꼽는다. 그는 서예의 여러 서체와 필법 가운데 글쓴이 자신의 개성과 예술 표현 방식이 잘 드러난 '민체'를 선호한다.

"민체는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소박하고 순수한 서민의 글꼴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쓰여진 글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지요. 제자들에게 항상 자신 고유의 글꼴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나만의 독창적인 글꼴을 완성해 냈다는 점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서예를 학습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자형(字形)에 치중한 임서 방법인 형임을 비롯, 시각적인 자형보다 내면적인 정신을 쫓아 임서하는 방법인 의임, 체본을 보지 않고 연습하는 방법인 배임 등 3가지의 서예 학습법이 있는데 박 장인은 '공임'이라는 또 한가지 방법을 덧붙였다.

"공임은 제가 만든 학습 방법의 하나입니다. 말 그대로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머릿속 글자를 떠올리며 써보는 방법이지요. 미리 상상으로 써본 획들은 화선지로 옮겨 올 때 많은 도움이 되는 학습법입니다."

#서예를 대하는 자세

서예가로서 30년 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박 장인은 보다 영역을 넓혀 전각 예술과 캘리그래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서예를 하면서 반드시 수반돼야 하는 것이 전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 작품에 마지막 화룡점정이 날인인데 직접 새긴 전각으로 날인돼야 온전히 내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캘리그라피의 열풍과 함께 오랜시간 서예가로 몸담아 온 박 장인에게도 캘리그라피는 삶에 신선한 바람이었다.

"캘리그라피는 제가 추구하는 민체와 가장 많이 닮아 있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또 한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요즘 캘리그라피의 매력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십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며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91년부터 명절날 서실 제자들을 데리고 요양원, 호스피스 병동 등을 찾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방문한 요양원이 너무 낡아 자선전에 출품했던 제 작품으로 얻은 수익금을 요양원을 수리하는데 쓰게 됐죠. 당시 갓 결혼을 했을 때 자선전 준비를 한답시고 6개월 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탓에 제 아내는 졸지에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됐지요. 아내에게 참 미안합니다."

그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봉사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포천시민대상 문화체육부분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재교 장인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바보천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별명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

"천주교 신자인 저는 '바보'로 살아온 김수환 추기경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걸어갈 길 역시 바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보천치라는 별명을 들으면 추기경님과 감히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내가 잘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 좋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