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논설실장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세계등대총회가 열린 지 1년여가 지났다. 인천시와 국제항로표지협회(IALA),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부가 공동 주최한 세계 등대 올림픽이었다. 총회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지역 도시명칭을 딴 '인천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등대'라는 인천 선언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등대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관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등대는 항해 및 건축적 가치를 넘어 해양문화, 역사, 사회변화 등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가 있는 인천에서 콘퍼런스가 열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받아들여졌다. 팔미도등대가 독특하고 인상 깊은 역사적 상징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선박의 안전을 묵묵히 지켜온 바다 길잡이였기 때문이다.
1883년(고종20년) 인천 개항에 따라 조선에 진출한 일본과 서구 열강들의 함선이 제물포항 연안을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어야 했다. 당시 일본 등의 등대 설치 요구는 강압적이었다. 우리 정부는 강요에 의해 인천항 관세수입에서 등대 건설 재정을 마련하고, 착공 1년 후인 1903년 6월1일 불을 밝혔다. 이날 소월미도 등대, 북장자서·백암 등표에도 불이 들어왔다.

팔미도는 인천으로 들어오는 해상 길목이다. 팔미도등대는 러·일전쟁의 전운도 목도했다. 팔미도 앞바다에서 붙은 러·일 군함들의 교전은 정보전을 앞세운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 군함 코레츠 호 등 3척이 자폭했다. 무엇보다도 팔미도등대는 인천상륙작전의 특등공신이다. 이른바 켈로(KLO) 부대의 활약은 6·25 전쟁의 전설로 남아 있다. 팔미도등대는 한국등대문화유산 1호이고, 인천시 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 그러나 국내 유일의 첫 유인등대로 남기도 했던 팔미도등대가 점등 116년만에 수모를 겪게 됐다. 지난해 세계등대총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등대'로 부산 가덕도등대가 선정됐다.

매년 대표등대를 선정한다고는 하지만 팔미도등대가 첫 대표 등대로 선정되지 못한 이유가 불분명하다. 그런가하면 지난 2월 결정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해수부는 5개월이나 감추고 있다가 이번 달 초 부산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항로표지의 날 행사에서 공개하게 된 사실조차 해명하지 않고 있다. 정부 스스로가 객관적 잣대를 흔들고 있으니 신뢰 수준은 바닥이다. 팔미도등대가 대한민국의 뚜렷한 역사를 간직했지만 첫 올해의 등대라는 새 역사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해수부의 인천 가림막을 끝까지 추적하고 거둬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