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나라 직접 느낀 곳 … 의식 깨어날 수밖에

 

▲ 지난 4월20일 문화재인 인천창영초등학교에서 열린 '3·1 혁명 100주년 기념 제1차 인천역사 포럼' 모습.


배다리는 동구를 하나로 묶은 명칭이었습니다. 만석부두를 거슬러 들어오는 바다물길이 화수동을 거처 화평동, 송현동, 송림동, 쪽배가 닿던 철교 밑 금곡동과 창영동까지 동구의 모든 동이 연결된 곳입니다.

나라의 역사가 농경사회에서 상공사회로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면서 수로, 즉 바다가 교통수단이었던 120년 전 개항과 함께 일제가 나라를 지배하면서 인천은 항구도시로 이국의 문물과 환경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치하에 '인천 부'라는 이름으로 동구와 중구 두 구밖엔 없었습니다.

항구 쪽 중구는 개항이 되면서 청나라와 일본 사람의 조계지가 넓혀지고, 만국 공원이 있듯이 여러 나라의 영사관이 들어왔습니다. 중구에 살던 조선인이 강제 이주된 동구는 전국 각처에서 개항과 더불어 모여든 조선 사람들의 마을이었습니다. 시인 박팔양은 '인천 항'이라는 시에서 산둥, 전라도, 경상도사람들을 드러내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실상을 기록합니다.

1906년 영친왕이 강제로 일본으로 출국할 때, 부두에서 "나는 안 간다!"며 애걸하던 어린 영친왕의 모습을 부두에서 일하던 조선인 마을 사람들이 배다리에 와서 전하니,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청을 차려 놓고 부모와 헤어짐을 소리높이 곡을 하며 울 듯이 한 달이 넘게 애절한 울음소리가 배다리에서 끊이질 않았다고 김활란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다리에는 이렇듯 중구에서 일자리를 가진 분들이 많아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 나라소식도 밝아 깨이지 않으려 해도 잃어가는 나라를 몸으로 느껴갈 수밖에 없는 장소였고 의식이 깨어 정신이 서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듯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의 수고로, 3·1 만세운동 인천 사건이 발굴 된지 수십년 만에 창영초등학교 구 건물에서 이희환 박사의 사회로 100주년 기념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토론 주자인 만세운동 연구 20년을 했다는 최태욱 목사님 발표에서 '인천은 당연히 앞장섰을 법한 기독교 감리 측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시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그 어느 곳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보다도 가치를 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일본선생 밑에서 배우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는 조센징의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만세운동에 불을 지피고 한 달을 넘어 산발적으로 시도했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고, 실제로 퇴학생수가 100명이나 된다는 그들은 누구의 자식들이었을까? 의식이 깨어간 서민 노동자의 자식들! 밥상머리에서 밥과 함께 뼈저린 부모의 말을 먹고 의식이 자라 자발적으로 일어서게 하는 정신이 되어간 배다리 사람들을 봅니다.

중구에 내리교회가 있었으나 출석인수는 동구사람들로 교육과 기독교 정신이 공존 하였고, 만세 운동 후 서서히 노동 쟁의가 중·동구를 들썩이게 하는 몸짓들은 민족정신으로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최태욱 목사님의 3·1 운동 연구발표를 들으면서 좀 더 고민하면서 들여다 본 배다리 시민정신이 서슬되어 간 흐름을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길용, 강재구 같은 분들의 행동은 자신의 자리에 다가온 문제를 순간 판단으로 나라의 분노를 숨 쉬게 하고 부하들을 구하는 대의로 들어서는 정신은 배다리라는 장소와 사람들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정리됩니다.

부모의 수고로 달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 일상을 이야기하는 작은 한마디도 뼈 속으로 스며드는 밥상머리 교육장이 120년 주거 군락 속에 호롱등이 가슴에 들어와 따끈하게 비를 내리게 합니다.
'배다리사람 특별히 전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선 사람들이었다.' 박경리 선생의 말씀으로 맺습니다.

/곽현숙 아벨서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