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어느날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던 길이었다. 머리가 백발인 한 남자 어르신이 한 쪽 다리를 절면서 지팡이를 짚고 넓은 시민공원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곳곳에 부착된 불법 전단지를 수거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정차한 상태에서 짧지만 결코 놓칠 수 없는 어르신의 선행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공원 산책로 가로수와 횡단보도의 경계석에 교묘하게 부착된 불법 전단지를 일일이 떼어내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횡단보도 한 쪽 구석에 놓여진 쓰레기봉지에 떼어낸 각종 전단지를 차곡차곡 집어 넣고 주변을 청결하게 정리 하는 모습이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이런 선행을 하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에 결코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봉사를 자처해 하는 것일까.

누군가 말하길 '당장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타인을 위해 봉사하라'고 했다. 그만큼 봉사활동은 본인과 타인에게도 기쁨을 주는 일거양득의 효능을 가진다. 봉사는 남녀노소 제한이 없다. 젊은이들에게는 보람과 성취감을 주고, 어르신들에게는 베품을 실천하며 젊게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봉사는 사회의 소금과 같다. 또한 아름다운 환경과 생태계를 보존하고 청결한 환경을 유지해 준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과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다.

오지, 벽지에 자원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또 다시 기꺼이 찾아간다. 봉사자는 자신의 작은 행위가 누군가에게 봉사이기 전에 우선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세상의 삶이 날로 힘들고 인심이 팍팍해지는 시대이다. 눈만 뜨면 들려오는 뉴스는 세상에 온통 악한 자로 가득한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점차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태연한 자세로 구석구석에 불법 전단지를 부착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생계비를 버는 수단일지는 모르나 자신의 불법행위에 전혀 미안한 기색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청소년은 미래의 관점에서 더 문제가 크다. 어느 날 시민공원에서 초등학교 5~6학년쯤 보이는 여자 아이가 자신이 먹은 음료수 페트병을 버리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하기에 "얘야, 여기에 버리면 안 되지"하고 지나갔다가 다시 그 지점에 돌아오니 공원의 설치물 위에 덩그렇게 버려진 음료수병과 함께 그 아이의 버려진 양심을 발견하고는 아이의 성장이 걱정됐다.
이처럼 하찮은 것이지만 대조적인 두 가지 행위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계가 먼저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윤리관, 가치관의 문제다. 왜냐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가치를 외치는 국가, 싱가포르에서는 길거리의 걸인도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지나친 정책일까. 선진국에서 이런 정도니 그 나라는 불법 부착물, 심지어 길거리에 껌이나 오물을 버리는 행위를 찾아볼 수 없다. 비슷한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우리와 딴판인 이런 문화를 우리는 남의 나라 일로만 간주하고 살아가야 할까. 의무와 책임을 자유라는 굴레 속에 안고 살아가야하는 민주시민공동체의 삶을 생각해 본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신체적 부자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선행 봉사를 실천하는 어르신의 삶은 분명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지면으로나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모두가 어르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은 착한 사람이 더 좋은 일, 더 착한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밝아지고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