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7월22일(수)

 아침 6시에 일어나니 밤새 퍼붓던 비는 그칠 줄 모른다. 겔내 16℃, 실외 12℃이다. 모레 아침 비행기로 서울로 가야 하는데 아직 700㎞나 남았고 비가 오면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 이 곳은 「헙스걸」성(省) 「툰넬「군 「바이싱트박」 마을이라고 한다. 버린줄만 알았던 무지개 송어를 할머니가 요리하여 가지고 왔다. 나는 지금까지 5일간 굶었다. 항생제와 소염제 덕에 설사는 멎은 듯 하나 안심이 안되어 지금까지 식사는 계속 하지 않았다.

 이 집 주인은 소드놈톱친(25) 부인 잉크델레르(21), 아들 오치르(4·번개라는 뜻) 외에 3개월짜리 둘째 아들과 4명이 살고 있고 조금 떨어진 「겔」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여자아이 같이 옷도 입히고 머리도 길렀다.

 몽골에서는 남자아이는 3∼5세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귀신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누가 남자아이인지 귀신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다. 귀신은 주로 남자 아이만을 골라서 잡아 간다고 믿고 있다.

 어제 약속대로 이 「겔」에서는 오늘 아침에 열린음악회를 열기로 했더니 근처에 살고 있는 친척들까지 모두 정장을 하고 모였다. 톱신·자로갈과 치멕트·자야는 자기의 히트곡도 부르고 또 합창도 하며 모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끝날 무렵 내가 마지막 곡은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두 인민가수가 아리랑을 합창하고 조금후에는 눈물이 글썽한 우리들도 다 같이 아리랑을 합창했다.

 떠나려고 하니 아주머니는 우리 차 뒤에 와서 우유를 뿌리면서 잘 가라고 빌어 주었고 길 가면서 먹으라고 많은 유제품을 싸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용돈을 많이 주고 오전 10시에 그 곳을 떠나 「불간」시로 향했다.

 오전 11시경(고도1,720m) 길을 잃었다. 전주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으며 「겔」도 나타나지 않는데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다.

 나침판을 보니 방향도 맞지 않는다.

 오후 1시30분 「오보」(고도 1,965m, 16℃)가 나타났다.

 주위는 울창한 숲이고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 목동이 다가오기에 길을 물으니 이 곳은 「이흐올」군 「홍골인다와」(사랑하는 여자의 고개라는 뜻)라고 하며 길은 험하지만 「불간」시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오후 2시20분 왼쪽에는 물소리 요란한 강이 나타나고 오른쪽은 바위산이다. 길은 계속 나쁘다.

 오후 2시50분에 전주를 발견했다. 몹시 반가웠다. 계속 전주를 따라가고 있는데 오후 3시15분(고도1,305m) 정기 노선버스 같은 버스를 만나 버스뒤를 따라 갔다. 그러다가 약 한 시간후에 버스를 놓쳤다. 그후 우리나라 대우자동차제 버스도 만났으나 곧 놓쳤다. 오후 4시20분 동계용 축사를 만나 점심을 해 먹고 또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비는 계속오고 한 시간후 뒷 바퀴가 수렁에 빠졌으나 고생 끝에 겨우 빠져나왔다. 그러나 또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우리 5명 모두 길을 모른다. 나는 나침반은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아까부터 경고하고 있었다. 오후 5시45분에 「겔」이 나타났다. 「불간」시로 가는 길을 물으니 오늘은 참 이상하다고 하면서 아까는 버스가 길을 묻더니 이번에는 선생님들이 또 길을 묻는다고 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왔으니 오던 길로 다시 가라고 한다. 한 50분 반대 방향으로 왔던 것이다.

 오후 6시45분에 고장난 트럭을 만났다. 길을 물으니 방향은 맞으나 길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스카치 테이프를 달라고 하기에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전구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후 늪지에 빠지기도 하고 망가진 다리를 아슬 아슬하게 건너기도 하면서 밤 10시에 「셀렝게」강가의 「후루크온달」시(고도 1,045m, 15℃)에 도착했다.

 오늘은 여러시간을 허비했다. 이러다가는 내일까지도 울란 바아타르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밤은 밤새도록 달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운전은 두 남녀 인민가수가 교대로 했으며 초원의 밤길은 정말 알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따라가다 놓치기를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겨우 길다운 길에 들어섰다. 새벽 0시20분 「셀렝게」강의 다리를 무사히 건넜다.

 모두 자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 잠에서 깼다. 차에서 내려 쳐다보니 왼쪽 뒷 타이어가 25cm 가량 찢겨졌다. 소위 말하는 「파스」가 난 것이다. 그때는 치맥트·자야가 운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을까? 98년 7월23일 오전 4시47분이었다.

 

 98년 7월23일(목)

 어제 「알락에르드네」 마을에서 새 타이어라고 해서 사서 교체한 그 타이어였다. 뒷 바퀴였으니 말이지 앞바퀴였으면 큰일날 뻔했다. 조심스럽게 가다 보니 오전 7시에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불간」시에 들어온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을 만나 자동차 수리소를 물어 함께 가서 소련군용 지프차의 타이어를 개조해 우리차의 「휠」에 끼웠다. 그런데 이 타이어의 폭은 우리 것의 3분의2 밖에 안되고 직경은 15cm나 더 컸다. 이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불간」이었다. 불간시에서 처음 만난 귀인이 Mr「불간」이었던 것이다.

 잠시 쉬었다가 오전 9시55분 「불간」시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렸다. 앞으로 울란 바아타르 까지는 약 360㎞ 남았다. 예정 보다 하루 늦었으나 오늘중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갈 수가 있다. 날씨가 좋은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 두 인민가수는 교대로 운전하고 교대로 잤다.

 오전 10시55분 「오르혼」강에 도달했다. 목동에게 길을 물어 보았다. 어제처럼 길을 잘못 들면 오늘중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정보수집을 하고 또 전주도 놓치지 않으면서 동남쪽으로 달렸다. 12시15분 늪지에 벤츠승용차가 빠진 것을 꺼내 주었다. 우리차는 4륜구동이니 믿음직스럽다. 오후 1시55분에 「톨」강(고도 1,005m, 25℃)에 도달하여 점심을 해 먹었다. 울란 바아타르를 출발해서 몽골의 초원을 총 2,962㎞ 달려온 것이다. 이 「톨」강은 울란 바아타르에서 흘러온 것이다. 우리들은 사기가 올랐다. 날씨도 좋고 밝은 낮이니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톨」강을 지나니 주위는 어느덧 돌산으로 바뀌었다. 오후 3시50분 「오보」(고도 1,275m, 25℃)에 왔다. 이제 280㎞ 남았다. 오후 4시30분경부터 사방은 끝 없는 초원이 펼쳐져 저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지고 가릴 것은 하나도 없다. 풀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니 사방에 여러 가지 모양의 뭉게구름이 떠 있다. 이렇게 맑은 하늘이 이 지구상에 있었단 말인가? 이 하늘을 우리 나라로 가져 갔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봤다.

 오후 6시40분경부터 왼쪽에 「꼴호즈」(집단농장)가 여러 곳 보인다. 오후 7시10분에 타이어를 점검하니 며칠전부터 조금 찢어진 채 사용하고 있던 왼쪽 뒷타이어의 튜브가 약간 삐져 나와 있다. 타이어와 튜브 사이에 「라이너」를 넣었지만 안심이 안된다. 우리는 포장도로가 나타나기만 바라면서 울란 바아타르를 향해 마지막 힘을 기울이고 있다.

 초원의 길은 어떤 때는 언덕 저 쪽이 안 보일때도 있다. 언덕에 올라 포장도로가 보이나 하고 보면 또 언덕이다. 이렇게 해서 아마 십여개는 넘은 것 같다.

 오후 7시30분 「트럭터미널」(고도 1,150m)에 도착하여 사이다(₩200)를 한 병 샀는데 이 곳에서도 병을 돌려 주어야만 살 수 있었다. 병이 귀한 것이다. 그 곳을 떠나 얼마 안가서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모두 박수를 한 없이 쳤다. 포장도로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우리들은 신나게 달리면서 아리랑, 혜은이의 감수광을 합창했다.

 그런데 15분도 지나지 않아 드디어 염려하던 왼쪽 뒷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아직 울란 바아타르까지는 100㎞나 남았다. 즉시 소련군용 지프차의 것을 개조한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우리차의 타이어보다 폭은 3분의2 밖에 안되고 직경은 15cm나 더 컸지만 잘 달리고 있다. 좌우 타이어의 직경이 이렇게 틀려도 갈 수 있는 것은 자동차의 차동장치(差動裝置, Differential gear)때문이다. 몽골 사람들은 이론은 모르지만 해보니 괜찮아 이런 개조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