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없던 학문이라도 … 흩날리는 '지적 향기'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에 있는 '성호기념관'

다산 정약용이 사숙(私淑)한 실학의 개척자 성호 이익 선생의 고향은 안산이고 농부이자 실학자였다. 당파는 남인으로 증조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아버지 하진(夏鎭, 1628-1682)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어 55세로 사망했다.

선생은 1681년 10월18일 운산 출생으로, 아버지 하진은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낳은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에서 낳은 2남 1녀를 남겼다. 선생은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서 사내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은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랐다. 선생은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했었는데, 후일 둘째 이복 형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선생은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녹명이란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제도다. 과거를 응시하기 전에 들른 녹명소에 먼저 시조 및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부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적은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한다.

보단자는 종6품 이상의 조정 관리가 서명 날인한 신원보증서다. 녹명을 받은 관리는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다음 응시자의 사조 가운데 <경국대전>에 어긋나는 결격 사유가 없을 때 녹명록에 기입하였다. 선조를 따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는 말이다. '부모가 반 팔자'란 속담과 꼭 들어맞는 셈이니, 인재 선출과는 거리가 영판 먼 법이었다.

바로 다음 해 9월에 선생이 스승처럼 섬긴 둘째 형 잠이 4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잠이 옥사한 이유는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잠은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죽었고 이에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며 셋째 형 서()와 사촌형 진()과 어울리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마침 근처에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 호로 삼았다. 선생은 이곳에서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농사를 짓고 글을 썼다.

선생은 76세에 어찌나 굶주림이 심한지 "졸지에 송곳 꽂을 땅조차 없게 되었으나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글하는 사람이 살기 어렵기는 저때나 이때나 매일반이다. 당시 상황을 선생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요즈음 선비집이 극도로 가난하지 않은 집이 없다. 내 궁핍은 차치하고라도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나 살기 어렵다고 한다.'

80세 되던 해인 1760년, 제자 권철신(權哲身)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세상에 대한 푸념 반, 자기 학문에 대한 체념 반이었다. 특히 평생 해온 유학 학술조차도 무익하다고 한다. 평생 유학자로서 실천궁행을 하였지만 소득이 없는(?) 학문에 대한 소회를 담아낸 게 아닌가 한다.

'요즘 세상 풍습이 물과 같이 기울어져 수십 년 전에 비하면 판연히 달라졌소. 나는 사람과 대면하여 일찍이 유술(儒術)을 갖고 말하지 않았소. 무익하기 때문이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 직위가 정삼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던 일)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이미 선생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그해 12월17일 오랜 병고 끝에 한 많은 삶을 마무리하였다.

평생 지속된 선생의 검소함은 장례에서도 드러났다. 선생은 별세 후, 수의는 평소 입던 옷으로 하고 종이 이불을 덮고 미리 종이에 써놓은 '성호징사여주이공지구(星湖徵士驪州李公之柩)'를 관 위에 까는 명정으로 삼았다. 관도 칠하지 않고 송진을 발랐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안산 첨성리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선생문집>, <이선생예설>, <사칠신편>, <상위전후록>, <근사록>, <심경>, <이자수어> 등이 있다.

현재 안산에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다"고 토로하였던 성호 선생을 기리는 '성호기념관'이 썩 훌륭하게 건립되었다. 모쪼록 성호 선생의 '실학이란 지적 향기'가 욱욱하니 퍼졌으면 한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