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처럼 빛나는 … 맨손의 '헌신'
▲ 세 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서 "세상을 바꾸는 구두닦이가 되고 싶다"는 박일등 장인이 웃음을 짓고 있다. 박 장인의 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경제적 부담에 복싱챔피언 꿈 접고
밥벌이하고자 15살부터 시작한 일
전업으로 '이름표' 달고 노하우 터득
경기 광주서만 15년째 '유명 인사'
세상 바꾸려 봉사활동·의원 출마도




거무튀튀한 구두약을 맨손으로 쓱쓱 바르고 빠른 손놀림으로 문지르면 어느새 헌 구두는 새 구두처럼 광이 난다. 구두약으로 얼룩진 구두닦이의 손에서는 세월의 노고가 느껴진다. 구두를 맡긴 손님은 세 평도 채 안 되는 구두박스에 앉아 구두닦이와 연신 대화의 웃음꽃을 피워낸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구두박스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주인장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구두닦이의 장인으로 통하는 박일등(57)씨는 경기도 광주의 유명인사이다. 40여년간 구두를 닦아온 그를 지난 27일 만났다.

#나는 일등 구두닦이

구두닦이를 업으로 하는 박일등 장인은 일등 구두닦이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름도 이미 '일등'이다. 왼쪽 가슴에 '박일등'이라 적힌 노란 이름표를 달고 열정적으로 일한다. 구두를 맡기는 손님은 그의 이름표를 보고 "일등 구두닦이시네요?"하고 미소 짓는다.

"박일등이라는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구두닦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이름표를 달기 시작했어요. 이름표를 달고 일하게 되면 손님을 대하는 자세나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밖에 없거든요."

박 장인은 경기도 광주 경안동에서만 15년째 구두닦이 일을 해오고 있다. 오랜 시간 구두를 닦으며 터득한 그의 노하우는 다른 이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나 구두 미화 분야에 고수로 통한다.

"구두닦이 일을 처음 시작한 건 열대여섯 살 됐을 무렵일 거예요. 가난했던 형편 탓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 생활을 해야 했죠. 당시만 해도 먹을 것이 귀해 밥그릇 수를 줄였어야 했거든요. 소위 찍새라고 해서 구두를 수거하는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니 거진 40여년을 구두닦이로 살아온 셈이죠."

#가난한 복싱선수에서 구두닦이로

전남 강진에서 나고 자란 박 장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이주했다. 대한민국 '복싱의 전설'이라 불리는 유제두 선수를 동경하고 있던 박 장인은 당시 복싱 챔피언이 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복싱 선수의 꿈을 키웠다.

"그땐 복싱 선수라 하면 알아줬죠. 챔피언이 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손 놓고 운동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에는 운동을 하며 복싱 챔피언의 꿈을 키워가게 됐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박 장인에게서도 증명이 됐다. 복싱을 시작한지 단 1년 만인 1979년, 부산시 선수권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해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챔피언의 꿈에 가까워져 갔다. 그 결과 최고의 엘리트 복서들이 모인다는 MBC 권투 신인왕 선발대회에 나가 48명 중 3위에 입상했다.

"프로 데뷔 후 도합 11전 10승 1패를 했습니다. 단 한 번의 패배 기록을 가지고 있지요. 전체 복서 랭킹 1위에 오른 전적도 있습니다. 챔피언 벨트가 코앞에 놓여있는 상황이었지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를 하게 됐지요. 전역 후엔 안타깝게도 예전과 같은 실력으로 돌아갈 순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챔피언의 꿈을 접었지요."

녹록지 않은 형편에 가장이 된 된 박 장인은 경제적 부담으로 수년간 해오던 복싱 선수생활을 모두 접고 본격적으로 구두닦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스물 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이혼을 감당하기가 벅찼습니다. 이혼 후 충격으로 방황을 일삼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지요. 아내는 저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 주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구두닦이

박 장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운명처럼 다가와준 아내 덕분에 그는 현재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사건 하나도 생겼다.

"부산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서울로 상경하면서 수중에 돈이 없어 기차 무임승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었지요. 30년이 지난 후 장문의 편지와 함께 현금을 담아 코레일로 보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80년대 기차 이용권이 5000원가량했던 것 같아요. 그것을 10만원으로 갚았습니다."

박 장인의 편지를 받아본 코레일은 그의 일화를 언론에 알렸다. 다양한 언론매체에서 박 장인의 일화가 소개되면서 그는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는 이후 광주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평소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오던 박 장인은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15년 전 시의원에 처음 도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세 번의 지방선거와 두 번의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구두닦이가 무슨 시의원이냐며 손가락질을 했지만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만일 구두닦이가 시의원이 되고 시장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그는 교통봉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일 아침 도로로 출근한 지 벌써 10년째. 박 장인에겐 한 가지 변함없는 소신이 있다.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동네 소문난 짠돌이지만 제가 안 입고 안 먹고 절약해서 모은 것들이 남을 위해 쓰일 때, 또는 미력하나 제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 저는 누가 뭐래도 이웃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