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4.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 (1) 촉나라 개가 눈을 보고 짖다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4.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 (1) 촉나라 개가 눈을 보고 짖다
  • 여승철
  • 승인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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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견이 좁은 자, 이대로 안주할 텐가
▲ 성호(星湖) 이익(李瀷) 초상화(성호기념관 소장)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촉(蜀)나라는 중국 남방이다. 사시사철 더운 곳이기에 눈이 내릴 리 없다. 그곳 개가 아마도 눈이 오는 다른 지역에 갔나 보다. 그러니 눈을 보고는 짖어댄 것이다.

촉견폐설은 흔히 식견이 좁은 사람이 저보다 나은 사람을 비난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촉견폐일(蜀犬吠日, 촉나라는 산이 높고 늘 안개가 짙어 해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개가 어쩌다 본 해를 보고 짖는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 성호 선생은 <곽우록(藿憂錄)>을 쓰는 자신을 이 개에 비유하였지만 성호 선생 말이 개소리일 리는 만무하다.


선생은 사안에 따라 의견을 달리할 줄 알았다. 식무자(識務者)에 대한 견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을 식무자로 꼽았기 때문이다. 식무자란 시무(時務, 시급한 일이나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을 아는 자다. 식무자는 나라를 경영하는 준걸로 <삼국지>에도 보인다. 유비(劉備)가 사마덕조(司馬德操)에게 세상일에 대해 물으니, 사마덕조가 "속된 선비가 어찌 시무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이니 오늘날 준걸로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가 있습니다" 하였다. <삼국지> 「촉지」 '제갈량전'에서다.

선생은 "국조 이래로 식무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또 선생은 정주(程朱)와 이황(李滉) 학문을 탐독한 성리학적 질서를 존숭하면서도 주자에게만 치우치는 폐풍에서 벗어나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수기치인(修己治人)학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당시 사회 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세치용에 실효를 거둘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실학이었다. 당연히 사장(詞章)과 예론(禮論), 주자집전(集傳)·장구(章句) 풀이에만 경도된 주자학적 학풍을 배격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학(西學)까지 독서 폭을 넓혔다. 선생이 정통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당대의 성리학적 사고에 경도되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독서 덕분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한 자라도 의심을 가지면 망언이라 하고 참고·대조만으로도 범죄라 한다. 주자의 글도 이러하니 고대 경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학문은 고루와 무지를 면하지 못한다"(<성호사설> 권2상, '논학문')고 하였다.

선생의 학문과 세계관은 중농주의가 바탕이다. 따라서 상업을 노골적으로 배척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실학(實學)에 초점을 두었다. 선생은 "어려서 배움은 성장해서 행하려 함이다. 평소에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는데 알려질 만하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반드시 그만한 재료를 준비해 놓아야만 실학(實學)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은 학문이란 성장해서 행하려는 것으로 알려질 만한 실력을 쌓고 구해야 된다고 한다. 결국 학문을 하는 목적은 현실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넉 자로 줄여서 학문은 실제 사회에 이바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의 한 주장인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다만 선생이 도가, 불가, 패관 등의 책을 읽지 않은 게 아쉽다.

선생의 실학은 아들 맹휴, 손자 구환(九煥), 종자(從子) 병휴(秉休), 종손(從孫) 중환(重煥), 가환(家煥), 삼환, 정환, 철환 등에게로 이어졌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환갑 때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15살에 선생의 글을 접하고 사숙(私淑)했고 선생의 종손인 이가환, 자형 이승훈(李承薰) 등과 사귀었다고 했다.

이 외에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과는 집안끼리 세교하였다. 증조부 상의가 일찍이 이수광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고, 선생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혼인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이렇듯 이익 선생 '일가 학자들이 숲을 이루었다' 하여 '일가학림(一家學林)'이라고 불렀다. 선생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산학(算學)의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 <동사강목>을 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경학(經學) 분야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천문학을 연구한 황운대(黃運大) 들이 있다. 이 흐름이 후일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른다.

이러한 성호 선생이 자신의 저서 <곽우록>에서 자신을 촉나라 개에 비유하였다. '촉나라 개'는 성호 선생인가? 아니면 저 당시나 지금이나 폐풍을 답습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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