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식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인천지사장

'갑질'은 영어사전에 'Gapjil'로 표기돼 있다. 갑질은 사회현상을 반영한 신조어로서 국어사전에 등록된 단어가 아닌 게 분명하다. 인터넷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 또는 갑을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외국어사전에는 명확한 단어가 없고,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니 만큼 분명 사회적 현상을 풍자한 심각한 문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렇듯 갑질은 우리나라 사람만이 사용하는 의미로써 사회적 문제를 함축한다. 매우 좋지 않은 행위가 내포된 두 글자로서 그동안의 사회 전반에 켜켜이 쌓인 고질적 병폐가 국민 모두의 가슴 깊숙이 응어리진 것이 시대변화 흐름에 맞추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유독 우리나라만이 갑을관계와 갑질을 혼동하고 동일시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랜 유교적 사회 유전인자로 전근대적 사고가 아직도 잔존하고 청산되지 못해서일까.
사회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추구함에 있어서 개인과 개인, 그리고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갈등과 대립은 부정적인 요소보다 긍정적 발전 방향을 향하는 동안 역할이 더 클 것이고, 이로 인해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성장 동력의 새로운 역동성을 위해서는 경제가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권력과 힘에 의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종속관계에 따른 갑과 을의 갈등으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묵살되고 역동적인 사회 발전에 근원적인 걸림돌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전근대적이며 구시대적 병폐 중 병폐다. 힘의 우위를 이용한 갈등 해소는 곧 힘을 바탕으로 한 갑질 행위이다. 이는 갑을관계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어떤 자에 대한 힘의 소유로 타인을 지배하는 능력이며, 두 번째는 어떤 일을 하는 힘을 소유하는 것으로 실제적으로 능력과 잠재력이라 했다. 후자의 경우 권력과 힘에 의한 지배와는 관계가 없으며, 지배와 능력 이 둘은 동일하기는 커녕 서로 배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권력과 관계되는 '권위'는 어떤 자가 가지고 있는 자질이 아니라 어떤 자가 다른 자를 자기보다 더 우월하게 우러러보는 인간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합리적인 권위라 할 수 있는 우열관계와 억제적인 권위라 할 수 있는 우열관계와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2014년 12월 땅콩회항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갑질을 비롯한 갑을관계에 따른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단편적인 사회문제로만 취급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일련의 갑질 사건들에서 우리는 사회 저변에 남아 있는 낡은 시대의 문화 변화 요구를 읽어 내는 성찰과 총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갑질을 단순히 개인의 우발적이고 단발적인 사회현상의 한 단편으로만 인식할 사안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원인을 파악하여 사회변화의 흐름을 인지하고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서구사회는 불복종의 역사요, 한국사회는 억눌림 그리고 순종의 역사라는 어느 학자의 지적도 있다.
그동안 억눌림과 순종에 대한 불복종이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변화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서열화 구조는 존재한다. 그러나 서열화 구조에서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가 된 갑을관계를 기능적·시스템적으로 보지 않고 권력과 수동적 권위, 권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다. 서구는 근대 시민사회 이후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상호 존중의 가치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상사와 부하 관계, 갑을관계를 연장자와 연소자 그리고 지배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보는 경향이다. 수직적 상명하복 구조의 조직문화가 팽배해 있고, 갑을관계를 정상적인 계약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취급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갑을관계는 결코 수동적 권위, 힘, 지배자로서 우월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기능적이고 수평적으로 그 조직의 목표를 향해 창의적이고 역동적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문화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 전반의 낡은 폐단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과거부터 쌓여온 낡은 사회의식 구조가 청산되지 못한다면 국민통합을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