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 죽음 앞에서 '인권수호' 다짐했죠
삶 전환점된 '연세대 기독학생회'
십정동 교회 열어 민중신학 실천
'5·3 항쟁' '6월 민주항쟁' 참여
데모하다 맞고 간첩 누명 쓰기도
"자본에 존엄성 상실땐 저항해야"
▲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의 자택에서 김성복 샘터교회 원로목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 지난 1일 경기도 양평군의 자택에서 김성복 샘터교회 원로목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인천에서 팔당물길과 첩첩산중을 지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2리로 들어섰다. 푸름에 둘러싸여 고요한 산기슭에 김성복(62) 샘터교회 원로목사가 기거하는 집이 서 있다. 자그마한 텃밭에는 무언가 심은 흔적이 가득했다. 손수 팠다는 연못에는 잉어와 개구리가 노닐었다. 얼마 전에는 기니피그를 길렀다가 50마리까지 불어 다른 곳에 분양했다고 한다. 그가 치열하게 싸웠던 독재, 불의,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그가 말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먹을 만큼 농사지으면 정말 맛있지요. 배추도 맛있고 무도 맛있고. 가끔 교회 아이들이 오면 묵었다 가라고 합니다."

그는 지난달 28일 평생을 바친 샘터교회에서 은퇴했다. 학생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뒤 36년 전 십정동 부흥촌에 개척교회를 내고 '민중신앙'을 실천하던 그였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에 마땅히 민중교회가 있어야 했다. 민주화, 통일, 인권, 환경, 공동체가 화두였다. 치열한 삶 때문일까. 건강은 좋지 않았다. 이른 은퇴를 결정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인천5·3민주항쟁을 앞두고 그의 삶과 우리사회의 과제에 대해 물었다.

그는 1957년 대부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인천에서 '유학'했다. 창영초, 인하부중, 제물포고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1977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만난 기독학생회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사회참여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소위 의식화 서클이었죠.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였어요. 전제국가, 독재국가였죠. 어쩌다보니 1학년 2학기에는 데모 현장에서 선봉에 서 있더라고요. 경찰이 제 사진을 찍었는지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붙곤 했죠."

그는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며칠 앞둔 5월13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연세대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해 궐기했을 때다.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대의원회 총무였을 때다. 병원에 급히 입원할 정도로 지독한 폭행이 뒤따랐다. 후유증은 아직도 몸에 남아 있다.

그는 졸업 후 1983년 십정동에서 샘터교회를 개척하고, 1986년 목사 안수를 받는다. 민중신학을 고민하던 그에게는 필연이었다. 십정동 부흥촌 산 25번지에 보증금 200만원, 월세 5만원의 만화가게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20명만 들어가도 꽉 들어차던 공간이었다.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만화가게가 비어 있다고 해서 계약했죠. 주변 교회를 찾아가 양해를 구했는데, 하지 말라고 말리시더군요. 교회가 들어갔다가 망해서 나오는 곳이라고. 과연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도 민중교회는 마땅히 가장 가난한 곳에 있어야 했어요."

그는 1986년 인천 5·3 항쟁에도 함께 했다. 샘터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던 때다. 교인들과 함께 주안 시민회관 앞으로 향했다. 그곳은 민주화, 민주헌법 쟁취를 비롯해 미제 축출, 파쇼 타도, 노동혁명을 이야기하던 '용광로'였다.

"좀 있으니 최루탄이 날아 오더군요. 주안역으로 도망치는데, 담이 무너져 깔려 죽을 뻔 했어요. 항쟁 이후 국민 직선제 개헌이 물 건너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에서 고문 받아 돌아가시면서 달라졌죠."

1987년은 기도회를 열고 투쟁했던 시기다. 그는 문익환 목사를 모시고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살려 내라고 부르짖었다. 지금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생각하면 눈물을 쏟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 결과는 모두를 실의에 빠지게 했다. 대중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뼈아픈 반성이 함께 했다.

"인권운동, 평화통일운동으로 제 방향을 정했지요. 대중보다 반발만 앞서간다, 이렇게 생각했죠. 생활협동조합 운동도 시작하고, 한반도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인천시민 모임도 했어요."

그는 1980년대 이후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인천을 뒤집어 놓았던 선인학원 시립화 투쟁과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에도 함께 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는 실천을 이어갈 때다.

"연안부두에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집회에 나갈 때였어요. 어르신들이 경찰에게 맞는데 옛날 학생운동 하던 가닥이 나오더군요. '야, 이놈들아. 뭐하는 짓이냐.' 욕설도 자연스럽게 나왔고요. 경찰에 연행도 됐는데 성탄절 준비하라고 풀어주더군요. 미군부대 공원화 추진협의회 활동도 기억나요. 미군철수를 외치던 그룹과 갈라섰지만, 대중보다 반걸음 앞서간다는 생각에 공원화 추진협의회에 몸을 실어서 일했죠."

그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에서 활동하다가 이른바 간첩단 '왕재산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왕재산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가 씌워져 활동가들이 대거 조사를 받았다. 결국 법원은 일부 인사에 대한 이적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고, 왕재산이라는 단체 결성 혐의에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통일 운동에 손을 끊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최근에는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을 파고들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에도 나섰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천부적인 선동가'라고 부른다.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선동을 나쁜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동은 대중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

"선동을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측면으로만 보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자본으로 인해 인간이 존엄성을 상실한다면 그에 저항해야 합니다. 주체는 민중이지요. 반인간적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이 신음한다면, 하나님이 같이 신음하고 계신 거죠."

촛불혁명 이후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그는 공정한 시스템, 공정한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죠. 근대화 200년을 겨우 5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해냈어요. 민주주의와 인권에서도 세계의 모범이죠. 세계 인민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가 돼야 해요. 그러려면 공정한 경쟁을 바탕으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파벌과 인맥이 좌우하는 세상이 되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기 어렵죠."

인천과 인천일보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인의식'과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천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을 포용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줄 필요도 있어요. 주인의식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인천 시민운동을 비롯한 각계 모든 분야가 발전했으면 좋겠네요. 인천일보도 인천을 중심으로 지역 언론의 중심이 돼 줬으면 좋겠어요. 방송국도 크게 만들기 위한 시민운동도 고민했으면 좋겠네요."

/글·사진 양평=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

 

▲ 박상문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명문미디어아트팩 대표.
▲ 박상문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명문미디어아트팩 대표.

"끊임없이 교회개혁사회참여 실천한 분"

박상문 지역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명문미디어아트팩 대표.

김성복 목사와 1979년 가을 감리교 인천동지방 청년연합회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나라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을 때다.
1979년 10·26사태를 비롯하여 12·12 군사쿠테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그야말로 군부독재와 반민주 정권이 활개를 치던 철권통치시대에 그를 만나 지금까지 선후배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나의 고민을 토로할 수 있었던 곳은 교회청년회였고, 감리교청년연합회였고, 인천기독청년협의회(EYC)였다. 김성복 선배는 맏형으로서 우리의 고민을 풀어주고 삶의 지평을 넓혀주신 분이다.

그가 36년간 목회를 하는 동안 많은 일을 목격하고 함께했다. 샘터교회를 개척하실 때 나는 주일학교 중등부 반사로 봉사했다. 교인과 시민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새누리신문'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1995년에는 지방선거에 나서셨다.

사실 지난 주일 은퇴식에서 밝혀진 에피소드지만, 목사님에게 한번 걸리면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끊임없는 사회참여와 신앙생활을 연계한 실천적 활동에 많은 이가 함께 했다.

그의 실천적인 목회활동은 이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십정동 골짜기에서 결식아동과 맞벌이부부를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어린이집, 아동센터, 초등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사회취약대상자를 위한 일을 멈춘 적이 없었다. 교회와 교단 개혁에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김리교부평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고, 인천중부연회 감독에도 출마해 미자립교회교역자 최저생활비를 보장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센터 이사장, 전국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상임회장, 한국투명성기구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정의부재 해결과 인권신장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랜 시간 우리사회의 민주화운동과 교회개혁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그가 조금 먼저 후배 목사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 40여년간 그의 삶을 옆에서 봤고, 여러 도움을 받은 후배이기에 목사님의 은퇴 이후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건대 무엇보다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