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올해는 우리에게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매우 뜻깊은 해이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과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이어 3월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대부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천안 아우내장터의 지방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됐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벌어진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첫 헌법이라 할 수 있는 10개 조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했고, 여기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이 헌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인천일보가 여행인문학 도서관 '길위의 꿈'과 함께 기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3만리 발자취를 따라서' 청소년 역사 원정대는 인천·서울지역 중·고생 13명이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임시정부가 첫 발을 내디딘 '상하이 서금이로'부터 우리 국군의 뿌리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터'까지 임시정부 유적지를 좇아가는 의미있는 역사탐방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학창시절 역사교육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부분은 대충 배웠고, 현대사는 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도를 뛰어넘기 일쑤여서 교과 내용도 다 들여다보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에 반해 임시정부가 처음 틀을 잡고 성립될 시기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3만리나 되는 그 여정을 찾아 떠났다는 13명의 청소년 역사 원정대의 이야기는 지면으로 만나는 독자들에게 기대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단지 교과서로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역사의 현장을 찾아 떠나 온몸으로 느끼는 역사여행이라는 멋진 기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낸다.
청소년들은 단순히 탐방에만 그치지 않고 역사관의 자료나 기록에 오류가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상하이 임정청사의 입장권 뒷면에는 여전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창설돼"라고 쓰여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오랫동안 4월13일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2017년부터 보훈처가 진행한 연구와 학계 의견 수렴에 따라 국호와 헌장이 제정, 반포된 4월11일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2018년 결정됐지만 정작 상하이 임정청사에는 반영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함께 청소년 역사 원정대는 조국의 해방 소식을 접한 임정 요인들이 환국에 앞서 충칭 임정 청사 계단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재현했다. 청소년들이 휴대전화 화면에 태극기를 띄우고 누구의 지시나 신호없이 "대한독립만세"와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라',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어느 글에서 읽은 이 구절은 역사의 진실이 아무리 귀중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용 없을 것이라는 진리를 한마디로 나타내고 있다.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처음 수립된 후 26년 동안 중국 곳곳을 옮겨 다닌 탓에 임시정부 흔적은 대부분 중국에 많이 남아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물론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굳이 올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기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이야말로 치열했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