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진 지혜공유학교 꿈터장     

일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이정표를 설정해주는 참스승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벅찬 일이다. 마음속 깊이 내면화되어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지혜와 혜안을 주는 참스승이 절실한 세상이다. 청소년기에 만난 참스승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며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그러나 요즘 학교에서 참스승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원인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형식적인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승과 제자가 없고, 신뢰와 존경이 숨 쉬지 않는 땅에서는 배움이 일어나기 어렵다. 지식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살아가는 지혜는 상호 간의 공감을 통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참스승이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의 참스승이었는가를 반문해 본다. 큰 가르침을 주었던 학창시절의 선생님, 교직 생활에서 만났던 선후배 교사, 책 속에서 만났던 인물,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나는 시간이 길고 짧음을 초월하여 현재까지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참스승은 많지 않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울림을 주는 참스승을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행복이며 행운이다.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평생 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안기는 사람은 상처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나에게는 한 분의 참스승이 가슴속에 살아 있다. 교직에 입문하여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라면 어떤 결정을 하였을까를 생각했다. 학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한 가르침을 준 교육철학이 오늘날의 나를 이끌었다. 학창시절에 만난 참스승은 김철구 선생님이다. 별명이 '쇠공'이었던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1학년 윤리 시간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의사처럼 하얀 가운에 명찰을 달고 수업을 했다. 윤리 첫 시간에 스님 한 분이 교실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시선은 선생님의 머리에 고정되었고 그 순간 모두가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바탕 웃고 난 후 수업을 마쳤지만 왜 스님처럼 머리를 깎으셨는지 궁금했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이 머리를 깎게 된 뜻 깊은 사연을 듣고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발이 유행했던 그 시절, 학생들의 머리는 길어야 1cm 정도였다. 3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제자들이 학생부의 단속에 자주 적발되어 훈육 받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셨단다. 머리를 깍으라고 이야기 했지만 제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은 솔선수범하여 긴 머리를 깍아버렸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스님처럼 밀어버린 머리를 보고 선생님을 따르지 않을 제자가 있었을까. 선생님은 나의 3학년 담임이 됐다. 신장염의 불편한 몸으로 오랫동안 입원해 있으면서도 손수 유인물을 만들어 제공한 선생님.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자신의 건강보다 제자들의 진로를 걱정했던 선생님.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공감한 선생님.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라는 급훈을 설정하여 칸트의 정언 명령처럼 살라고 일깨운 선생님. 평교사로 광주과학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광주 용연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문제 학생들에게 '사랑의 처방사'로 사랑과 관심을 실천한 선생님. "학생들의 단점과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고 에너지를 심어주면 스스로 자정해 나간다"는 걸 49년의 교직 생활을 통해 체험했다는 선생님은 나의 가슴속에 숨 쉬는 영원한 참스승이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면 아름답고 행복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도래할 것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존중받지 못한 아이들은 사회에서도 자신을 치유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여 올바른 성장을 방해한다. 이들의 말은 옳다. 아이들은 천재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미래이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희망이다. 아이들의 성장의 터인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행동으로 말하는 교육환경을 기대한다. 우리 모두 서로의 스승이 될 때 그곳에 행복이 있다.

/안종진 지혜공유학교 꿈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