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내서 쓴 수기, 도움 됐다면 그걸로 됐죠"
▲ 은수연씨가 산책로를 걷고 있다. /사진제공=은수연

 

▲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표지. /사진제공=은수연

 

▲ 은수연씨가 성폭력·가정폭력 예방교육 강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은수연

 

▲ 은수연씨의 강연을 듣고 성폭력 사회를 바꾸기 위해 실천하고 싶은 변화들을 적은 포스트잇들. /사진제공=은수연


9년간 목사 친부로부터 성폭행
심리 치료 받으며 펜 잡기 시작
3년 연재 글 엮은 책 10쇄 찍어
상담치료사로 활약하며 강연도


따스한 햇살이 4월을 가득 메우고 있다. 코끝을 간질이는 봄바람에 엄마, 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들뜬 아이의 표정이 싱그러운 봄소식을 알린다. 여느 화목한 가정의 아버지들처럼 손잡아 주길 바랐던 '그'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생이 되던 그 순간까지 목사였던 친부로부터 9년간 당해 온 성폭행, 아름다운 기억만 남길 바랐던 과거, 그러나 세상을 향해 은수연씨는 펜을 들었다.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가 지금 시작된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라던 그 사람의 말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사실을 말하면 죽게 될지도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은, 내가 집에서 아빠에게 겪은 일을 한 사람 두 사람 외부인에게 말하게 된 때였다. 그 과정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아빠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짓은 벌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사회적으로 아빠가 죽일 놈이 될 짓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中에서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이었을까?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잘못한 사실이 없음에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죽이며 살아간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쓰여진 친족 성폭행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공개하기까지 은수연씨에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가해자로부터 벗어난 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피해 수기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었죠. 써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예전 기억을 들춰내는 것이 괴롭기도 했고 누가 이런 걸 보겠나 싶은 생각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죠. 또 글재주가 워낙 없어 망설이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가해자와 나만 아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의 책처럼 가해자가 기록하지는 않을 테죠. 나 혼자 쓰는 것은 일기고 일기는 끝이 납니다. 처벌을 받고 세상에 다시 나와 평범하게 살아갈 그를 생각하니 끝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결국 고민 끝에 수기를 쓰기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은씨의 수기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실렸다. 사실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잔혹했던 그녀의 수기는 공개되는 첫날부터 파장을 일으켰다.

"난리가 났었죠. 저를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물론, 이 글을 본 이들은 너무도 놀랐다는 반응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왔죠. 또 용기를 낸 것에 큰 박수도 보내왔습니다. 이후 소식지라는 것에 대개는 주의 깊게 보지 않지만 연재 시작 이후, 제일 먼저 펼쳐보는 페이지가 수기 연재라는 말도 들려왔습니다."

4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와 가해자만의 비밀로 남을 뻔했던 기억들은 세상에 알려져 갔다. 은씨는 서툰 글 솜씨에 국문학과 교수의 지도까지 받으며 신중하게 글을 다듬었다. 작가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지만 누구의 힘으로도 당시의 기억을 전하기엔 부족했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림을 그린다거나 춤을 추는 것보다 글쓰기가 저 나름대로 달란트라 생각했고 저의 글이 성폭력 피해를 입고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해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수단으로도 저의 글이 필요했습니다."

'지난번 가출했다 잡혀갔을 때 그 사람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너는 이제 이미 이렇게 된 몸이라 집 나가봐야 좋은 남자 만나기도 틀렸어. 나가봐야 몸밖에 더 팔 게 있겠어? 그 사람은 자신의 나쁜 짓 때문에 내 인생은 앞으로 더는 좋아질 수 없고, 자기 손아귀를 벗어나면 더욱더 나빠질 것이라고 세뇌시키려는 듯 말했다. 아니 나는 너한테 붙잡혀 있으면 더 나빠지고, 더 죽겠어. 개소리 마. 탈출이 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됐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中에서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
세상 밖을 나온 은씨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더 이상은 피해자인 그녀가 부끄러움에 숨을 필요는 없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다수의 성폭행 피해자가 겪듯, 가해자가 감옥에 간 후에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죠. 누군가로부터 항상 쫓기는 꿈을 꾸던 어느 날, 지긋지긋하게 저를 괴롭혀 온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공포의 대상에 맞서겠다는 의미였죠. 뒤돌아 선 순간,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늘 저를 괴롭히던 악몽은 꾸지 않게 됐습니다. 이처럼 저는 워낙 밝은 성격이기도 했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맞설 수 있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저를 밝은 성격의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을 쏟아주신 외할머니는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지난 2012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 3년 동안 연재한 수기를 책으로 엮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올해로 10쇄를 발행하며 많은 이들에게 용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출간 이후, 상담 치료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는 쇄도하는 강연 요청 속,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강연을 하며 성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을 하거나, 아동 청소년 상담하는 일을 하며 저와 같은 피해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북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콘서트에 참석한 관중들 가운데 한 명이 성폭력 피해자였는데 어차피 망가진 인생 엉망으로 살겠다며 절망을 하고 있을 때, 책을 접한 뒤부터는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지금은 어엿한 사회복지사로 성장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드는 생각은 '그래 한 명이라도 내 글이 도움이 됐구나 그거면 됐다'였습니다. 글 쓰길 잘했다고 생각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반응들이 별로다. 성폭력을 다룬 기사들이 누가 더 충격적이고 끔찍한지, 선정적인지 경쟁이라도 하듯 써내는 게 불편하다.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상이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만 조금 바뀐다면, 지금보다 자기가 겪은 일을 스스로 바라보는 시선이 편해질 수 있을 텐데 싶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中에서

인면수심
그녀가 이 글을 통해 그렸던 세상은 화려하지 않다. 범죄 없는 세상을 외치며 막연한 꿈을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딘가 성폭행 피해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고 스스로 패배한 인생이라며 좌절하고 있을 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거면 됐다.

지난 1월, 핏줄이라는 지독한 연결고리 속에 단 한 번도 용서한 적 없던 '가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담담히 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를 용서했다.

"봄날이 온 것 같았죠. 평생을 누굴 미워하고 원망하며 사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 없다고 하니 마음의 자유가 주어진 것과 같았죠. 그가 죽은 날, 저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올케가 장례식에 와서 저보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가라더군요. 관 뚜껑 열어버리겠다는 말을 농담 삼아 던지고는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가족들과 그동안 쌓아두었던 묵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네요. 그들을 용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인면수심',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의 말. 최근 우리 사회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친족 성폭행 가해자들을 수식하는 말이기도 하다. 은씨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주장한다.

"형량을 마구 늘린다고 이 범죄가 줄어들 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선진국의 사례와 비교해 성폭행 범죄자에 대해 100년, 200년 종신형이 내려지는 것을 보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징적인 법적 처벌이 곧 가볍게 볼 범죄가 아니며 경각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특히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가족으로부터 벌어지는 성폭행은 더욱 우리 지역 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상담 및 지원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2
한국여성민우회 02-335-1858
여성긴급전화 국번없이 1366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한국여성의전화 02-2263-6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