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개항 이후 이주하기 시작
북성동 터 잡고 차이나타운 세워
의선당서 제사 지내고 동포 만나
답동성당·홍예문 건축 일익 담당
의선당이 1926년(민국 15년) 북성동으로 이전한 것을 알려주는 '의선당 문심처' 편액.
의선당이 1926년(민국 15년) 북성동으로 이전한 것을 알려주는 '의선당 문심처' 편액.

 

청나라 말기인 1893년 세워져 인천 화교들이 제사를 지내고 정보도 교류하던 의선당. 인천 화교사회의 적극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 2006년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바
청나라 말기인 1893년 세워져 인천 화교들이 제사를 지내고 정보도 교류하던 의선당. 인천 화교사회의 적극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 2006년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북쪽 대문인 선린문 앞으로 인천중화기독교회 건물이 보인다. 1917년 감리교 선교사 맥클라렌 여사와 중국인 기독교 신자인 손래장(孫來章)이 개인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이래 100여년의 세월을 인천 화교들과 함께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북쪽 대문인 선린문 앞으로 인천중화기독교회 건물이 보인다. 1917년 감리교 선교사 맥클라렌 여사와 중국인 기독교 신자인 손래장(孫來章)이 개인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이래 100여년의 세월을 인천 화교들과 함께했다

 

청국영사관 회의청 내부. 청나라 영사관의 부속건물로 1910년에 당시 영사였던 가문연(賈文燕)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화교 역사 문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개방됐다.
청국영사관 회의청 내부. 청나라 영사관의 부속건물로 1910년에 당시 영사였던 가문연(賈文燕)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는 화교 역사 문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개방됐다.

 

 

'인천 개항과 함께 시작한 인천 속 작은 중국'은 <차이나, 인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린 인천 속 차이나하면 가장 먼저 '짜장면'을 떠올린다. 단순히 중국음식이 전해졌을 것이란 어릴적 생각은 커서 짜장면에 담긴 사연과 긴세월 이겨낸 화교들의 정신력을 알게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짜장면은 중국음식이 아닌 한국에 살던 화교들이 한국식으로 만든 음식이다. 이제는 중국에서 한국의 짜장면을 홍보한다. 이 책은 차이나타운을 지켜 온 사람들과 맛으로 느끼는 차이나를 기본으로 한다. 또 인천에서 접하게 되는 '작은 중국'을 소개한다.

▲숫자로 보는 '차이나 인천'
1883년, 인천의 빗장이 열렸다. 1년 전 임오군란으로 대거 청국군이 한반도에 몰려왔고, 그들을 따라 산둥성 인근의 중국인들도 상당수 인천에 발을 내딛었다. 인천시는 인천 속 중국을 숫자로 분석했다.
올해 1월 현재 '차이나타운'이 있는 중구 북성동 총 인구는 3093명으로 이중 남성은 1587명, 여성 1506명, 총세대수는 1662세대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구의 외국인은 총 4023명으로 남성 2063명, 여성 1960명이다. 그렇다면 인천의 화교 국적은 어떻게 될까. 중국인은 1019명, 타이완은 940명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모두 4개의 패루가 있다. 패루는 붉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전통 대문으로,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마을의 입구에 패루를 세웠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패루를 세웠다.
한중문화관 앞에 자리한 차이나타운 동쪽 대문은 '인화문'이고, 차이나타운로 1번지에 자리한 차이나타운의 서쪽 대문은 '한중문'이다. 또 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남족 대문이자 중심문은 '중화가'로 명명됐고, 초한지 벽화거리에 자리한 차이나타운의 북쪽 대문 이름은 '선린문'이다.
차이나타운 짜장면거리의 중화요리 업소 수는 모두 29곳이다.
차이나타운을 찾는 방문객은 해마다 30만명을 넘었다. 한중문화관과 짜장면박물관, 월드커뮤니티센터, 개항장 문화체험교실 등의 방문인구를 통해 2016년 34만663명, 2017년 33만5737명, 2018년 34만4526명임을 알 수 있다.

▲인천 속 '차이나 정신'
인천에서 '중국'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장소는 의선당과 청국회의청이다.
중국식 사당인 의선당(義善當)이 세워진 시기는 1893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의선당 내 관우신당과 관음신단 사이에 '공봉당금황제만세만세만만세'라는 위패가 놓여 있는 것으로 미뤄 청국 말기쯤으로 추정된다. 공소(公所)로 출발한 의선당은 누구나 와서 제사도 드리고,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는 공간이었다. 이 곳에서 인천 화교들은 동포끼리 만나 타국살이의 설움도 풀고 정보도 교환하며 서로를 보듬었다. 또 화교들끼리 단결하고 의롭게 살자는 뜻에서 만들어 돈 없고 갈 곳 없는 어려운 화교들을 돕는 자선단체 역할도 했다.
의선당 편액에는 역사가 담겨 있다.
인천대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는 "의선당에서 가장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대웅전 천장에 걸려 있는 여러 편액들"이라고 말했다.
정문 앞 의선당 편액은 1915년 장전명이 보냈고, '주지영종황합경'에 기증한 것으로 돼 있다. 1928년 '경술고희' 편액은 황합경의 70세 탄신을 축하해 제자들이 보냈다. 1926년 '의선당 문심처'라고 쓴 편액은 의선당이 북성동으로 이전한 것을 알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선당은 2006년 대대적인 개보수를 했다. 이 때 옛날 검은색 기와를 헐고 중국에서 가져온 지금의 금색으로 바꿨다.
청국영사관 회의청은 1910년 청나라 영사로 부임한 가문연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가 공화국으로 바뀐 1912년 전 지어진 유일한 공공 건물이자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인천대와 인천화교협회는 2018년 12월17일 차이나타운에서 '구 청국영사관 회의청 복원 기념식'을 가졌다. 회의청 건물은 인천대 중국학술원의 지원으로 지붕을 바꿨다. 복원된 회의청은 인천화교협회에서 보관해온 1900년대 이후의 사진과 자료를 전시해 향후 화교역사문물전시관으로 활용한다.

▲인천 속 '차이나 숨결'
인천의 대표적 근대 건축물인 답동성당은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화교 벽돌공이 참여해 건설했다. 성당 시공에 참여한 화교 벽돌공은 조선에 정주하지 않는 계절 노동자였다. 그들은 대체로 11월 말쯤 짐을 싸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듬해 4월 봄쯤 다시 돌아와 작업했다. 4~11월에 걸쳐 약 8개월간 공사 후 번 돈을 가지고 고향에 가서 5개월을 생활하다 다시 돌아오는 형태이다.
130여년 전 중국에서 태어나 인천에 영면한 오례당(吾禮堂·우리탕)은 1883년 인천에 들어와 30년간 살았고 당시 재산이 1000억원대에 달한 대부호였다. 그가 스페인 출신 부인의 영향으로 답동성당에 종을 기부했다.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지나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인 홍예문 건축에도 중국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강암을 쪼아서 약 10m 높이로 쌓은 홍예문은 설계와 감독을 일본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 노동자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인천 유일의 중국 교회인 '인천중화기독교회'는 지난 2017년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에 쇠로 만든 중국 종 3점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광복 후 부평구 조병창에서 가져온 것으로, 중국에서 공출한 각종 쇠붙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들 3점의 종은 각각 송·원·명나라 시대에 제조됐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사진제공=인천시


불과 150년 전까지 인천은 한적했다. 그러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은 한국을 알리는 세계의 창이 됐다. 임오군란(1882년) 이후 인천에는 빠르게 중국인이 몰려왔다. 그에 맞춰진 각종 상업이 번성했고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인천시가 펴낸 <차이나, 인천>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책의 머릿말에는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고찰함으로써 인천의 역사 복원과 도시재생, 관광산업의 미래를 그려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인천 속 차이나타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것은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