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사각사각 … 소망에 새긴 정성
▲ 서각 작업 중인 박영환 장인.

 

▲ 박영환 장인이 자신의 공방 나무아저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원 행궁동 공방 '나무아저씨'
태권도 하다 목각에 빠져
25년간 글귀·솟대 조각
500작품 전시 인기 포토존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 이리라'.
김기택 시인은 겨우내 모진 고통을 견디고 봄에야 비로소 꽃을 피운 나무의 강인함을 사랑했다. 이토록 나무를 사랑한 이는 또 있다. 수십 년간 나무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나무 깎이의 명인'을 수원에서 찾았다. 열두 번째 장인 박영환 장인을 소개한다.

#나무와 사랑에 빠진 나무 아저씨

우리의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성곽 주변으로 팔달문까지 이어진 행궁동 일대는 '공방거리'가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다.
420m 길이로 이어진 공방거리에는 서각, 칠보, 한지, 규방 등 30여곳의 공방들이 조성되면서 수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소개되기도 한다.

여러 공방 중에서도 서각 공방을 운영하는 박영환 장인은 공방거리에서 '나무 아저씨'로 통한다.
그는 다양한 공예품 가운데 나무 위에 글자를 새기거나 솟대와 같은 목각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서각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덕분에 나무 아저씨라는 별칭을 얻어 유명세를 얻고 있다.

"주로 나무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유독 나무를 좋아합니다. 거칠고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난 뽀얀 속살이 모진 칼바람을 묵묵히 견뎌내 온 모습처럼 느껴져 대견스럽기까지합니다. 나도 저렇게 오랜 시간 후에도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무의 매력에 차츰 빠져들게 됐습니다."

말본새에서 느껴지는 섬세함과 달리 놀랍게도 그는 오랜 시간 수원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나무에 매력에 빠져 취미 삼아 시작했던 서각 공예는 어느덧 25년 동안 조각도를 쥐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했고 자연스럽게 태권도장을 꾸리게 됐죠. 25년 전 이곳 수원에 태권도장을 열면서 도장에서 사용할 좌대를 직접 만들 요량으로 취미 삼아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음과 양의 조화가 있듯, 일평생 동적인 운동을 해왔으니 나머지 인생은 정적인 일을 하며 내 인생을 균형 있게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운영하던 도장을 접고 본격적으로 이 곳 행궁동에 공방을 차리게 됐죠."

#행궁동 공방거리 터줏대감

'나무 아저씨'로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연 박 장인의 공방에는 크고 작은 50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주로 염원을 담은 소망 글귀나 솟대 등의 작업을 하며 공방거리를 찾은 방문객들에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박 장인은 수강생이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목각 공예품을 직접 만들거나 서각을 새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공방거리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못했을 때가 있었죠. 당시 이곳을 알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언론이나 방송매체에 출연을 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방송을 보고 공방을 찾아와 공예를 배워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게 됐죠. 이곳을 오시는 분들에게 좋은 추억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주목받는 작품 하나가 있다. 현판 위에 새긴 문구 하나로 다녀가는 관광객마다 사진을 찍어 가는 통에 그의 공방은 행궁동 '포토존'으로 알려지게 됐다.

"소망 글귀를 나무에 새기면서 나무의 영험한 기운과 시너지를 일궈내는 것이 서각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죠. '돈 세다 잠들게 하소서'라던가 '술술 풀려라' 같은 글귀를 새긴 서각 공예품을 공방 앞에 두었더니 사진 한 장씩은 꼭 찍고 가시더라고요. 작품을 보고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덩달아 저도 행복해졌습니다."

박 장인의 작품들은 대개 2~3일에서 길게는 15일까지 작품에 상당한 공을 들여 제작된다. 좋은 기운이 녹아들기를 기원하는 마음까지 보태 한 각 한 각 정성스럽게 작업을 하던 그였다.

"나무도 사람과 같아요. 나무가 사람의 몸과 같다면 조각도는 침이라고 봐요. 혈자리를 알고 놓는 침처럼 나무도 혈자리를 알고 제대로 조각해야만 합니다. 그걸 무시하고 서각을 하려한다면 기계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은 공방 거리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스타 박지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원 태장동 일대로 조성한 '박지성 도로'에 세워진 정체불명의 솟대도 바로 박 장인의 손에서 탄생된 작품들이다.

"당시 의뢰를 받아 솟대 작업을 했습니다. 지역의 상징성이 드러난 박지성 도로 주변으로 마을 어귀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 했던 솟대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업에 임하게 됐습니다."

언제부턴가 수십 곳의 공방이 밀집해 있던 행궁동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이젠 손에 꼽을 정도의 공방만이 이곳 거리를 지켜가고 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공방 거리를 볼 때마다 이 곳을 누구보다 아끼고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박영환 장인은 크게 안타까워했다.

"안타깝죠. 예전의 사람 냄새나는 공방거리는 좀처럼 보기 어려워졌죠. 이곳이 유명해진 만큼 이웃 간에 정을 다지던 공동체가 무너진 것도 사실에요. 지역민들과 함께 협력하고 상생을 하는 것만이 공방거리를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