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황금가지 대표

올해 말로 2G폰 통신서비스를 종료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여태 잘 쓰고 있고 앞으로도 잘 쓸 생각에 여분의 핸드폰 너 댓개를 준비해 놨는데, 앞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통첩이다.
느닷없이 심박이 빨라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급속한 세상의 변화에 느림보처럼 살아가고 좀 불편하지만 있는 것 그대로 사용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됐다. 광속만큼 빠른 대체 망이 언제 어느 때곤 준비돼 있어 세계화의 첨병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친절한 멘트까지 곁들여졌다.
아날로그 삶을 즐거움으로 삼는 허다한 인생들이 무시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은근히 부아가 일었다. 스마트폰이 대세이고 컴퓨터 없이는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지만, 30년 가까이 사용해온 번호와 기기를 바꿔야 한다는 불안감은 가뜩이나 고루한 성정을 단박에 뒤집어 놓았다. 그야말로 극심한 변화의 세기에 느리게 살아가는 자의 비감이다. 30년 묵은 고물 라디오지만 여전히 돌비 스테레오 음질로 때마침, 쓸쓸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단절과 소수 사용자, 또 다른 소통을 위한 방향 전환 등의 단어들이 머릿속에 뒤엉켜버렸다. 현재의 처지에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갈래 길밖에 없어 보인다. 세상의 흐름에 표류하듯 흘러갈 것이냐, 다소 힘에 부치더라도 역류하듯 가던 길을 갈 것이냐 등이었다. 생각이 부족한 듯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럿의 생각들을 늘어놔 보았다.

정리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세상과의 소통은 너무도 중차대한 당면과제이자 살길이었기에 문제점부터 살펴봐야 했다. 그러나 생각의 가지들이 럭비공처럼 종잡을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버렸다.
요절이란 단어로 자리 매김한 가수 김정호. 우연찮게 고물 소리단지에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흘러나왔을 때, 그가 인천 연수동 적십자결핵요양원에서 입원 치료했던 장면이 오버랩 됐다.
당시 이 곡을 발표한 정황으로 보아 인천에서 작곡한 게 아니냐는, 다소 엉뚱하지만 진지하게 추론해 봤다. 이참에 현재 적십자병원 인근 아파트 거주민들이 가수 김정호를 기념해서 동네 노래자랑대회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든다. 시인 김지하 또한 결핵을 앓아 이 요양원에 입원했던 흔적을 소환해 소박하나마 백일장이라도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름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간에, 인천 땅 한 뙈기에 이름을 걸었던 모든 영혼에 현재진행형이란 수식어를 붙여본다. 현재는 어제와 내일을 불러 세우는 엄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수레에 앉아보지 못했다면 인천에서 숨 쉬고 살았노라 자신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인천에서 살다간, 앞으로도 살아가 티끌만한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모두 인천과 끈끈한 인연과 운명이고, 인천의 존재감을 증폭시키는 계기들이다.

얼마 후, 2021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번호를 유지한 다음, 010번으로 꼭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가 또 들어왔다. 다양한 혜택을 위해 대리점 또는 고객센터에 문의하라는 문구와 함께였다. 최후통첩이었다.
정부가 한몫을 거들었다. 앞으로 0.9%, 92만 9천명의 소수 사용자들은 다수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그 기간까지 단절을 유예하고, 경제성 없으며 불합리하고 소모적이었던 소수의 사용자들은 자발적으로 정부지침에 협조해야 한다는 소식을 첨부했다. 이미 미국, 일본, 호주, 대만에서 2G를 없애버렸기에 한국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명기했다.
쇼팽, 모차르트, 슈베르트,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임화, 구상, 함석헌, 김지하, 김정호 등의 공통점은 폐결핵이었다. 건강한 삶에서 벗어난 소수자였다. 앞으로 사라지게 될 2G폰의 절묘한 운명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팔짱을 끼고, 현재의 상황을 조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소수자라는 언어가 겨울나기 같던 삶의 가지에서 봉우리라도 펴서 인생의 꽃을 틔워보겠다는 의지 정도로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면 될 성싶은데 말이다.

그냥 있는 거 그대로 유지하고 살아가게 할 순 없을까. 30년 동안 애지중지 사용해온 번호와 함께 죽을 때같이 사라지고 싶은 거. 뭐, 그런 미망(迷妄)을 선진사회로 들어서는 우리사회가 약자의 심상으로 인정해주면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