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심장지대 인천'서백범 김구 발자취 따라 걷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생전 모습.

 

▲ 김창수 감리서 탈출로(1895년인천부오만분지일)

 

▲ 인천 감리서 옛 전경

 

▲ 백범 김구 선생은 1911년 '안악사건'으로 붙잡혀 서울에서 옥살이하다가 1914년 인천으로 이감됐고, 이때 인천항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 박영문 객주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 주윤호 진사의 집. 지금은 하나의 건물만 남아있다.

 

▲ 저자 이희환 박사


인천 감리서 감옥생활 중 개화사상·신학문 눈떠 … 땅 파고 탈출

母 곽낙원 여사, 옥바라지 위해 인천항 객주 박영문 집 식모살이

구명 노력한 유완무와 성태영, 쓰기 어려운 김창수 → 김구 개명

강화도 3대 부자 주씨 집안과 인연 … 주시용 처는 조봉암의 6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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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3월19일. 23살 청년 김창수가 탈옥에 성공한다.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청년 김창수는 백범 김구가 돼 반만년 겨레의 가장 큰 사건인 일제치하 때 민중의 횃불이 됐다. 백범 김구는 훗날 인천을 '역사의 심장지대'로 치켜세웠다. 인천에서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 동지들을 추모한 백범.

청년 김창수를 백범 김구로 변화시키고, 독립운동가의 사명을 가슴깊이 심어준 곳 인천. <청년 김구가 만난 인천, 사람들>이 이희환 제물포구락부 관장으로부터 백범이 탈옥한 3월19일을 기념해 곧 세상에 빛을 본다.

그의 책 속 김구의 숨결을 좇아본다.

▲ 역사의 심장지대, 인천

1896년 3월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김구, 해주감옥에 붙잡혀 있던 김구는 외국인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인천감리서에서 심문을 받았다. 김구는 그해 8월3일, 9월6일, 9월10일 세 차레 일본인이 배석하는 합동 신문을 받았다. 당시 김구는 자신을 의병좌통령으로 칭한다.

이희환 관장은 "이재정 인천감리 겸 인천항재판소 판사와 가미야 기요시 일본영사관 경부의 서명이 같이 들어가 있는 공초가 말해주듯, 인천항재판소에서의 심문은 일본 영사관의 조직적 개입 아래 진행된 합동신문 방식이었다"고 바라봤다.

세 번째 심문 후 일본영사관의 영사대리 하기와라가 김창수를 참형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했지만, 법부는 '왕이 결정한 사항'이라며 유보했다. 백범일지에서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병신년 8월26일 대군주께서 친히 전화를 해서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을 내렸다(백범일지 120~121쪽)"라고 언급했다.

고종이 끝내 양형을 재가하지 않자 김창수는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2년의 감옥생활, 그는 이 곳에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눈을 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백범일지 179~180 쪽).


이희환 관장은 이를 "그의 사상적 전환의 시기는 1896년 여름부터 1898년 3월에 이르는 인천감리서 감옥에서의 독서체험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고 설명했다.

김창수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항 객주 박영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이희환 책에는 '감리서 옆문으로 통하는 계단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과 '박영문 객주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골목집'을 비롯해 '황성신문에 실린 박영문 칭송 광고'를 게재했다. 그리고 이희환은 1898년3월19일 김창수가 조덕근과 양봉구, 김백석 등과 옥실 마루 밑 땅을 파고 빠져나가는 탈옥 현장의 발자취를 조망해 추정 탈출로를 실었다.


▲ 김창수에서 김구로, 연하라는 호의 의미

이 관장은 머리말에 검여 유희강과 백범 김구와의 관련 소문의 실체를 밝히는 데 노력했다. 그리고 여기서 백초 유완무와의 관계성을 찾는데 애썼다.

이 관장은 "청년 김창수의 구명에 앞장섰던 인물이 검여와 마찬가지로 시시내(지금의 서구 시천동)의 진주유씨 출신의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그 인물이 백범일지에 비교적 상세하고, 그러나 베일에 싸인 인물로 묘사된 백초 유완무라는 인물"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희환은 지난 2009년 '백초 유완무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통해 유완무의 신원과 생몰연대를 확인하고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활동과 북간도 망명 이후의 행적을 정리해 2010년 유완무의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데 힘썼다.

이 관장에 따르면 김창수는 유완무의 제자인 강화 장곶에 사는 주윤호 진사 집에 몇 달간 머무르다가 한성으로 돌아왔다.

'백범일지'에는 유완무와 성태영이 청년 김창수란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고 하여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주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이라 바꿔주었다고 기록했다.

창원대 도진순 교수는 "김창수의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호를 연하, 자를 연상으로 지은 것은 유완무가 당시 전국적인 비밀 조직을 조직하거나 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창수가 김천 월곡(달이실) 성태영의 집에 머물던 1900년 여름 어느 날, 유완무가 찾아와서 3자가 회동했다. 그 자리에서 다음이 결정됐다. 창수(昌洙)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 주었다. 이름은 김구라 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으로 행세하기로 했다."(백범일지 174쪽)


이 관장은 "김창수는 원래 상인출신으로 호나 자가 없었는데, 유완무와 성태영이 처음 지어준 것"이라며 "1914년 자신의 호를 연하에서 백범으로 바꾸면서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 내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는데, 연하라는 호는 아무래도 하등사회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상등사회의 양반적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된 호로 인식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유생으로서 학식이 깊었던 유완무와 성태영이 난세인 풍진 세상에서 연잎 밑을 잠행하지만, 언젠가는 연꽃 위에 오르는 거북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김구의 호를 연하, 자를 연상이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란 도 교수의 의견을 수렴했다.


▲강화 장곶 버드라지와의 인연
"서울에 와서 유완무의 제자인 강화 장곳에 있는 주윤호 진사를 찾아갔다. 김경득의 집에 들어가기는 여러가지 염려되는 바가 있어 비밀히 주 진사 집만 내왕했다.

주 진사는 백동전 4000냥을 유씨에게 보냈는데, 나는 그것을 온몸에 돌려 감고 서울로 왔다. 주 진사의 집은 해변이었으므로 11월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달려 있었다. 또한 해산물이 풍족한 곳이었으므로 몇 날을 잘 지내고 왔다."(백범일지 175쪽)

이 관장은 "김창수는 1898년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을 만나 충청도 연산, 전라도 무주, 경상도 지례를 거쳐 다시 무주에 유완무와 같이 옮겨와 지내다가 서울에 잠시 올라왔다가 강화도 화도면 장곶의 유완무 제자인 주윤호 진사의 집을 처음 찾았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유완무와 주윤호의 인연은 선대로 오른다. 유완무의 선친 유보형의 묘가 화도면 장화리에 있는 것으로 추론해 선대의 어느 시기 강화도 화도면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한학을 배운 유완무에게 아마도 주윤호가 글을 배왔던 것으로 이희환은 가정했다.

강화리 신안주씨 집안은 강화읍의 홍씨, 온수리의 김씨 집안과 함께 강화의 3대 부자 중 하나. 백동전 4000냥은 주 지사가 아닌 형 주윤창이 마련했을 것으로 그의 증손 주영원 선생이 고증했다.

주윤창은 해공 신익희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동창, 주윤창은 아들 주시용보다 며느리 조은하를 비서처럼 믿고 맡겼다. 조은하 할머니는 강화의 창녕조씨인 죽산 조봉암과 6촌 관계 일가이다.

주윤창은 강화의 민족학교인 나산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교사로 봉직했다. 나산학원은 이동휘가 세운 보창학교 내리지교. 이동휘와 주윤창의 관계가 예상된다.

이 관장은 "1920년대부터 1921년 사이에 강화지역 대동단과 이동휘,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라인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며 "이는 주윤창이 이와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주시용의 처가 조봉암의 6촌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다. 즉 백범 김구 - 죽산 조봉암 등 3·1운동 참여자 - 강화 좌익으로 이어지는 강화 민족운동의 라인 속에 주윤창이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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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희환 박사

"청년 김창수, 백범 김구로 발돋움 한 곳은 인천"

감리서 탈옥 3월19일 맞춰 출간 … 막바지 작업 한창


"역사의 심장지대 인천은 청년 김창수가 김구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이희환(54) 박사, 현 제물포구락부관장은 요즘 '백범 김구' 화두에 골몰해 있다. 홀로 있는 사무공간, 빛보다는 어둠이 어울릴법한 곳에서 이희환 박사는 마지막 혼을 불어 넣고 있다.

<청년 김구가 만난 인천, 사람들>(명문미디어아트팩)은 김구가 인천감리서에서 탈옥한 3월19일을 기념해 출간된다.
삼일절 100주년을 맞은 올해, 뜻깊은 만큼 가슴이 애린 지금. 이희환 박사에게서 김구와 인천을 전해 들었다.

이 박사는 "올해는 3·1혁명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3·1(만세)운동인가. 3·1혁명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지만 저는 한국근현대사를 분기해 준 1919년의 거족적인 만세운동은 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일갈했다.

김구와 인천의 뜨거운 인연은 대단하다. 하지만 김구와 인천을 매개로 한 지역의 연구는 폭넓고 세밀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 박사는 "이 책을 묶어보겠다고 용기를 낸 것은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됐다"며 "하지만 이전에 진행한 여러 연구가 모여 이 책이 탄생하게 됐다"는 배경을 설명했다.

이 박사는 지난 2007년 인천문화재단으로부터 '인천대표문화인물'로 선정한 검여 유희강 선생과 만나면서 책 집필의 첫 발을 뗐다. 당시 최원식 대표이사가 "인천에 떠도는 검여 집안과 백범 김구와의 관련성을 실체적으로 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한 게 끊임없는 추적이 더해져 김구와 시시내 유씨집안과의 관계를 기술하게 됐다.

여기에 백초 유완무와 김구의 관계를 통해 독립유공자 지정까지 이어졌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를 의뢰받아 청년 김창수(김구)의 인천 감옥 투옥과정을 엮었다.

'약산 김원봉', '김산평전', '조봉암평전'에 이어 최근 '마지막 무관생도들' 등을 집필한 소설가 이원규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인천근대사와 인천인물사의 지평을 확연하게 확장하는 큰 성과이며 나아가 백범 연구의 상세화를 위한 중요한 텍스트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언급했다.

이 박사는 "김구는 훗날 인천을 역사의 심장지대라고 회고하며 인천에서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과 동지들을 추모했다"며 "이 책이 백범의 역사의 심장지대 인천과 그곳에서 식민지 억압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세상에 좀 더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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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희환 박사는 …
韓 근대문학 전공 … 인천 역사 연구


이희환은 한국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인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가운데 시민운동에 참여 중이다.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과 경인교대 기전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제물포구락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인천문화를 찾아서>, <김동석과 해방기의 문학>,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 근대도시 인천의 역사·문화·공간>,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 - 인천개항사를 통해본 식민근대>, <문학으로 인천을 읽다>, <만인의 섬 굴업도> 등이 있고, 최근 공저로 발간한 <인천의 도시공간과 커먼즈, 도시에 대한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