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라도 좋다, 이분들께 부끄럽지 않다면
▲ "독서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알아 갈수록 내 피의 온도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는 김재옥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선조들의 사진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문득 '뿌리'가 궁금했던 고아
구두 닦으며 근현대사 독학
역사 지키고 알리는 꿈 키워

기념사업회 자금난 시달리자
생활비 줄여 수백만원씩 보태
"역사 없으면 나도 존재 못해"
'3·1운동 기념관' 건립도 준비

1919년 3월1일. 의암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은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나라의 자주를 선포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에 맞춰 민중들의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김재옥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선조들이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저항하던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100년으로 향하는 시간 속에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은 감정이다.

이유는 많지 않다. 애국심 때문이다. 지금의 나라를 있게 한 '독립운동' 정신을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몸 던졌다. 그렇게 살기를 어느새 반평생.

"(손병희 선생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분이 일제에 맞서는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외친 3·1운동의 기폭제였다."

20일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김 이사장의 목소리는 다소 격양돼 있었다. 수십년 '역사활동가'를 자처한 인물에 걸맞듯 역사 알리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설명을 시작한 그의 입은 마를 듯 분주했다. 사무실 한쪽을 가득 채운 민족대표 33인의 사진을 가리키려다, 서대문형무소 재판기록 등 역사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너무 바빠 보인다고 하자, 그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휘호로 알려진 '기사회생(起死回生)'를 쳐다보더니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기적 같은 일이 바로 우리 독립역사"라며 "다소 격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국민들이 제대로 모르거나, 잊을 수 있다는 노파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수원시를 비롯한 전국을 누비며 독립역사 조명 등에 앞장선다. 지역과 단체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등 역사관련 사업서 힘을 보태는 인물 명단엔 늘 그의 이름 석 자가 올라있다.

한편으론 김 이사장을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시선도 있다. 역사와 관련된 연고도 없고, 학자도 아닌 일반인이 과하게 나선다는 이유다. 실제 김 이사장은 예나 지금이나 주유소 업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그가 자란 배경을 둘러보면 의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 1954년 인천의 한 섬에서 자란 김 이사장은 고아였다. 고작 12세에 부모를 잃은 뒤, 학업을 포기한 채 구두닦이로 연명해야만 했다.

머지않아 18세가 된 김 이사장은 '뿌리'가 어디인지 궁금했다. 이에 인천 등지를 계획조차 없이 헤맸다. 쉼 없이 마을을 둘러보거나, 주민을 붙잡고 이야기 했다. 단서를 찾을만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때 자연스레 접하게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근현대사'였다. 하지만 생활고 탓에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배움의 갈증이 쌓일수록 독서에 더욱 매진했고, 역사교수와 선생을 찾아가 질문하고 듣는 방법으로 해소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독서 등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알아 갈수록 내 피의 온도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며 "곧 역사를 지키고 알리며, 나라에 헌신하자는 꿈으로 탄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0년부터 수원에서 주유소를 운영한 김 이사장은 본격 역사 활동을 구상한다. 출발은 기부와 봉사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부터 다지자는 취지다.

틈틈이 수원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김 이사장은 2004년 지역 초·중·고·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멤버에 들어가 1억원을 흔쾌히 내놨다.

그는 10년 정도가 2011년, 가장으로 짊어지던 무게를 조금 내려놔도 될 시점이 되자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에 입회해 간절했던 역사 활동을 펼 수 있게 됐다. '우선 역사부터 알리겠다.' 그가 내민 첫 포부는 당찼다. 현재 민족대표와 관련된 기록은 물론이고 연구·교육도 많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첫발을 디딘 것도 잠시, 기념사업회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금난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김 이사장은 이에 다달이 수백만원 사비를 털어 보탬이 되고자 했다. 학생 장학금, 불우이웃 성금에 기부도 하던 터라 당장 생활비를 줄여야 할 정도로 지출이 비대해졌다.

홀로 자라 피땀 흘려 모아온 돈이었지만 역사를, 지역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는 별 사유가 되지 못했다.
김 이사장은 이후 기념사업회 차원의 교육자료 제작, 학술회의 개최 등을 주도했다. 남다른 그의 추진력에 감동한 회원들이 뭉치면서 계획했던 대부분 사업이 이뤄졌다. 그는 성과를 인정받아 2016년 들어 이사, 회장, 이사장 순으로 연속 추대됐다.

그는 "역사가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한 때 대출까지 고민해가며 기부했다"면서 "오직 나라를 위한 삶을 살다 이름을 남긴 선조들처럼 죽어서도 부끄럽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취임 직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운동가 함세웅 신부 등과 함께 '3·1운동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민족대표 후손들과 각종 캠페인을 열어 국민에게 이 계획을 알릴 예정이다.

이 밖에 여러 항일독립 관련 단체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거나, 친일청산을 위해 수시로 머리를 맞대는 등 행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는 과거나 현재나 외세의 간섭과 공격에 시달렸으며, 서로에 대한 불신이 있다"며 "민족과 정의가 살아있는 미래는 우리 모두가 사람을,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장은 민족대표에 대한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그는 "민족대표 중 일부가 친일로 변절했다는 설을 두고 우리 모두 따지기보다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며 "독립운동 출발에 불을 지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이사장의 꿈은 수원 지역에 '민족대표33인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으로 비로소 날개를 활짝 편다. 그는 최근 전액 자부담으로 건물을 짓고, 그 중 일부를 민족대표와 관련된 역사교육의 장 등으로 운영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김재옥 이사장은 "서울 쪽에는 역사 관련 기념관이 많지만, 수원도 깊은 역사가 있다. 이에 기념관을 짓기로 마음먹었다"며 "3·1운동이 100주년이 된 오늘, 나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김현우 기자 kimhw@incheonilbo.com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는
1952년 민족대표33인 중 한 명이었던 연당 이갑성 선생의 정신계승과 유가족 상호 간의 친목을 위해 설립된 '33인 유가족회'가 시초다. 1956년 사단법인으로 설립허가를 받았고, 2012년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민족대표들의 사상과 독립운동 정신을 알리는 목표로 교육자료 발굴 등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