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눈물로 세워진 인천 토건 시설

 

개항은 인천을 통한 일제의 수탈 야욕과 뜻을 같이 한다. 근대 인천에 건설된 각종 토건 시설들은 이를 대변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적 시장인 인천미두취인소는 한국 증권시장의 모태지만 경제수탈의 전형의 역사를 안고 있다.

홍예문은 일제의 조계지가 넓어지며 수탈을 위해 산능선을 깎아 만들었다.

인천항은 백범의 강제 노역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 인천 미두취인소
▲ 인천 미두취인소

▲미두취인소 터(現 신포동 국민은행)

1896년 3월19일 설립된 한국 최초의 쌀 거래소가 있던 곳.

- 1896년 설립된 인천 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는 쌀의 선물거래, 청산거래를 취급하는 회사로 일제가 한반도 내 미곡시장 장악을 위해 진출한 대표적인 수탈기구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자 당시 일본인들은 본토의 쌀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끈질긴 압력을 행사, 인천항을 쌀수출 전초기지로 변모시켰다.

인천 미두취인소의 거래대상은 미곡, 대두, 목면, 명태어 등 7개 상품이지만 실제로는 미곡 1종으로 한정됐고 매매거래는 전후장으로 구분돼 집단경쟁매매 방법으로 행해졌다. 거래는 3기로 구분해 1개월 내 거래된 매도·매수 물량을 거래 당사자 간에 정리하는 방식으로 취인소에 등록한 중개소를 통해 거래토록 했다.

이러한 미두취인소는 유일하게 인천에서만 설립·운영됐고, 투기적 성격이 강해 당시 미곡거래에 참여한 조선인 대부분은 가산을 탕진하고 일부 성공한 경우에도 궁극에는 몰락한 뒤 미두장을 떠났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미곡의 품질개선과 쌀값의 적정화 및 표준화'이지만 실제 오사카 기미시장의 투기거래에서 파산한 일본상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거래소의 투기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인들을 유인해 토착자본을 흡수하고 장악하는 속내를 담았다.

미두(米豆)는 오늘의 증권거래와 비슷한 개념으로 현미쌀 1석당 1원의 보증금을 미두중개점에 예치하고 이 보증금으로 쌀거래가 이뤄졌다.

투자방법은 당시 15개소의 미두중개점을 통해 곡가의 10%를 보증으로 걸고 현미 100섬에서 300섬까지 투자가 가능했으며 3개월 후 쌀값이 오르면 이익을 보고 쌀값이 내리면 손해를 보는 방식이었다.

미두취인소의 고객 90%가 조선인이었으며 미두장에 바친 돈이 줄잡아 15년 내 수억 원이라 하여 당시 이로 인한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폐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 취인소 등록이 쇄도하기에 이르렀으며, 1931년에는 인천과 경성주식현물거래소를 합병돼 조선거래소 인천지점으로 유지됐다. 1936년 3월7일, 경성·용산·신용산·부산·익산·나주·원산·목포·군산 지점이 폐지됐고,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가 강화되면서 인천미두취인소도 사라졌다.

인천의 미두왕으로 불린 반복창(潘福昌)은 오랫동안 곡물 중매점에서 근무하면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 초 미두장에 뛰어들어 300만원의 거금을 거둬들였다.

그는 이 돈으로 현재의 인천 신신예식장 자리를 구입, 돌축대를 쌓고 300평이 넘는 저택의 터를 닦았다. '

화동(花洞)자켓'이라고 불리던 멋쟁이 신여성과 서울 을지로 조선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울려 화제를 불렀지만 쌀의 시세폭락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당시 전국에서 몰려든 미두꾼은 신포동(터진개)이나 용동으로 몰려들었다. 현재 인천미두취인소터는 사라졌다.
 

▲ 홍예문
▲ 홍예문

 

▲홍예문

1908년 건설된 홍예형식의 터널.

- 홍예문(虹霓門·무지개문)은 중구 응봉산 마루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돌문이다. 중구 홍예문 1길과 2길이 만나는 해발 65m의 고개에 서 있다.

일제강점기 인천항에서 홍예문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경찰서와 공회당 같은 중요 시설이 있었던 만큼 홍예문 건설은 일본 공병대가 담당했다. 일본 정부는 조계 설정 당시 한국 정부가 제시한 해안지대를 넓혀서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중앙동과 관동 일부 약 2.3㎢(약 7000여 평)만을 선택했다.

이후 일본인의 증가로 인해 일본은 조계의 확장을 꾀했다. 당시 열악한 교통사정으로 일본 조계나 항구에서 만석동으로 이동하려면 서북 해안선을 따라 가야 했기에 일본인들은 비교적 짧은 구간인 현 송학동 산능선을 깎아 만석동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 공사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에 의해 착공된 홍예문은, 공사가 예상하지 못했던 굳은 암반층으로 힘들었다. 이에 50㎝ 정도의 큼직한 직육면체 화강암들을 쌓아서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8.9m로 만든 터널이 1908년 완공됐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다. 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 사람들은 산둥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건설비 3만2250원 가운데 한국정부가 1만6800원, 일본거류민단이 1만5000원, 일본영사관 격인 인천이사청이 450원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홍예문을 통해 일본인 거주지가 확장됨에 따라 한국인 거주지였던 북쪽의 전동, 인현동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로 잠식됐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49호.

▲ 인천항 갑문
▲ 인천항 갑문
▲ 인천항갑문제1도크 공사모습
▲ 인천항갑문제1도크 공사모습
▲1903년 인천항 갑문 전경(인천일보 자료사진)
▲1903년 인천항 갑문 전경(인천일보 자료사진)

 

▲인천항 갑문
인천항 개항에 따라 만들어진 항만 도크 시설.

- 인천항은 조선초기 제물포로 불리며 서해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 요충지로, 1883년 개항 때까지는 작은 항구에 불과했다.

개항 후 1884년 말부터 항구로서 기능이 확대됐다.

초기 항만축조사업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일본 상인단체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1884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인천해관의 러시아인 토목기사가 이 공사를 맡아 15, 16명의 인부를 동원해 인천해관 전면인 현 항동 일대에 석축을 쌓아 만조 때 배가 출입할 수 있도록 선착장을 건설했다.


인천항은 1906년 대한제국의 각 항구(인천항을 비롯한 10개 항구) 수축 계획이 수립돼 근대적인 축항공사가 진행됐다.

이에 인천역을 우회하는 일대에 매축 및 호안석벽의 축조공사에 착수해 선박출입과 계선 및 하역이 가능하도록 이중갑문식 선거(제1도크)를 축조했다.

1911년 6월11일 최초의 갑문시설 기공이 현재 1부두 자리에서 있었다. 총공사비 566만원을 들여 1918년 10월 준공했다. 이 선거는 수면적 약 10만㎡(약 3만평)으로, 4500t급 선박 3척을 동시에 접안·하역할 수 있었다.


선거 설비의 규모를 보면 갑문의 전장은 164.85m, 갑문 길이는 129.24m, 갑문 폭은 18.18m, 측벽 높이 14.55m였다.

1930년대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자 인천항은 대륙침략기지의 전초항이 되었다.

이후 8000t급 이상의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시설로 제2도크 축조계획이 세워졌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로 공사는 공정의 30% 선에서 중단됐다. 이후 1966년부터 1974년에 걸쳐 제2도크가 완공됐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11년 '안악사건'(일본이 독립군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조선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고 날조한 사건)으로 붙잡혀 서울에서 옥살이하다가 1914년 인천으로 이감됐고, 이때 인천항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백범일지에는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무 두(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 세(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