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타올랐던 불꽃, 배움으로 다시 피우리라

 

▲ '리뷰인천' 2호 표지

 

▲ '이길용' 책 표지


<리뷰인천> 2호에는 '배다리 산업도로'라는 특집기사에 강덕우 선생이 쓴 글이 있다. '3·1 운동의 발원과 노동운동의 점화'라는 글이다. "인천의 독립만세 운동은 3월6일 시작해 학생과 일반시민을 중심으로 동맹휴교와 상가가 철시되었는데, 그 장소가 배다리 문화권이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 지혈사>에 의하면 인천지역의 만세운동 횟수 8회, 집회인 9000명, 투옥자 15명으로 기록돼 있다. 시작은 학교였다.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공립학교 학생 수가 100명가량 줄었다는 결과로 봐서 관련자들은 퇴학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월9일, 기독교도와 청년 학생이 만국공원에 모였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오후 8시30분께 경인로(지금의 우각로가 경인로)에서 50명이 만세운동을 하다 한 명이 체포되었다. 10일에는 시민과 학생 200명이 시위를 감행하고 8명이 체포되었다. 30일에는 조선인 상점 철시라는 형태로 시작된 상가들의 시위는 경찰의 협박으로 다시 개점하였다.

이는 개항 후 일본인이 살던 지역이라 일본 군·경의 사전 단속이 철저했는데도 봉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위에 대한 격려문을 돌리고 조선독립신문 배포 등 배다리 문화권역에서 점화된 3·1운동은 5월까지 시 전역에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길용>이라는 책 표지에는 올림픽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있다. 책에는 전국을 다니는 경남 마산 사람 이치상 거상이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창영동으로 이사를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길용은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다가 집안사정으로 1918년 귀국했다. 철도국에 근무하던 중 임시정부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다.

그 후 동아일보 사회부기자로 일하다 1936년 올림픽 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 가슴에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다시 저항한다. <이길용> 책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배다리 사람들의 개척적인 성향과 교육열 속에서 자라난 민족정신을 본다.

<리뷰인천> 2호를 다시 보면, 만세운동 후 1920년대부터 노동쟁의가 계속 일어난다. 동양방직, 우마차조합, 양말직공, 인천염업조합, 갯벌매립공사장, 인천수산주식회사 중매인, 위생계 소속직원, 인천차량회사, 세관 구내 하역노동자 등의 노동쟁의가 단독이나 연대파업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노동운동은 자본가와의 대결뿐만 아니라 쟁의가 되풀이되면서 민족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환되었다. 독립 없이는 노동자 위치도 개선될 수 없다고 확신한 까닭이었다. 노동자들은 동구 조선인마을 사람들이었다.

2007년 중·동구 산업도로 무효화운동이 시작된 2년 후, <배다리에서 미래를 묻다> 라는 책을 냈었다. 교육자 최종선 선생이 신문보도를 보고 찾아왔다. 일정 때 부친이 지금의 창영초등학교 교사였고, 본인은 초등학생이던 시절 저녁마다 사랑방에 부친의 지인들이 모여 나라 일을 성토했다고 전했다. "배다리는 송곳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정신이 단단하던 곳이죠. 여러분의 활동 소식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1월20일자에는, 인천발전연구소에서 지역을 연구한 결과, 중·동구 산업도로는 지하도로로 해야 한다는 연구 보고가 실렸다. 지상도로 무효화 보고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에 반듯한 인천 역사문화의 답을 본다.

/곽현숙 아벨서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