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향한 불꽃같은 삶 … 김란사 열사를 만나다
▲ 14일 남동구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공연 하이라이트를 선보이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 제작발표회' 하이라이트 공연 사진들.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 삶' 무대

인천문예회관 3월1~3일 음악극

유관순 스승 이자 고종 밀사 활약

배우·무용수들 '그녀의 삶' 묘사



빛을 잃은 조국, 당시 이 땅에 태어난 선열의 가슴은 뜨거웠다. 냉철하게 세상을 보며, 빛을 되찾겠다는 투지는 최악의 일제강점기에도 꼿꼿했다.

김란사, 대한은 이 세 글자를 잃지 말아야 한다.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인 올해. 광복의 대의를 품고 떠났지만 타국에서 목숨이 끊긴 김란사. 인천문화예술회관의 4개 예술단이 심혈을 기울여 무대에 올릴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 3월1일 막을 올린다.

김란사를 모티브로 그녀가 품은 꿈, 광복을 향한 도약 등이 시립예술단 합동 공연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1919년. 시대는 일제의 칼과 총의 억압에 어두웠다. 군화발에 짓밟히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노동력이 착취됐다. 사라진 조국의 설움은 극에 달했다. 그 때, 등불이 된 선열들. 잊었던 그들의 희생을 이제라도 일깨워야 할 때다. 올해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인천예술회관은 3월1~3일 대공연장에서 약 70분간 음악극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을 선보인다. 가려진 기억 김란사가 인천시립예술단 소속 교향악단, 합창단, 무용단, 극단 230여 명의 단원이 모두 참가해 부활시킨다.

▲인천서 횃불 된 김란사.

개항의 도시 인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뭉그러졌다.

1872년 평양서 태어난 김란사, 그녀는 자존감이 강했다. 인천부윤 하상기와 결혼에 그치지 않고, 신교육의 열정을 불태웠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인문학 박사인 그녀. 유관순의 정신적 스승이자, 대한독립을 위해 삶을 불태웠던 그녀가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으로 재조명된다.

12년 만에 인천시립예술단이 뭉쳤다.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은 2004년과 2006년에 걸쳐 공연한 뮤지컬 '심청왕후', 2007년 탄생한 뮤지컬 '바다의 문' 이후 12년 만에 선보이는 인천시립예술단의 3번째 창작 합동공연이다.

2018년 초, 4개 시립예술단 감독이 공동으로 구상한 이 공연은 1년 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탄생했다.

인천시
립극단 예술감독인 강량원 총연출을 중심으로 여러 번에 걸친 회의 끝에 극의 전반이 구성됐고, 지역전문가
로부터 자문을 받아 역사 고증에 힘썼다.

8월에 1차 대본이 탈고 됐고 가을이 지나 겨울에 이르러 작곡이 완료됐다. 12월 대본과 음악을 기초로 핵심이미지를 책임지는 무대 미술 디자인과 안무가 완성됐다.

강량원 총연출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시작점에 논란이 많았는데 공립단체인 우리가 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특히 인천은 근대가 도입되는 관문으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는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또 "우리나라의 독립과 정부 수립의 절반은 여성의 참여와 실천으로 이루어졌기에 여성독립운동가, 그 중에서도 유관순 열사의 스승인 김란사 열사에 주목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차근호, 이시원 작가와 함께 '인천프로젝트'팀을 만들어 극작을 맡은 최원종 작가는 "주인공 김란사는 당시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던 인천을 통해 접한 새로운 사상과 도전정신을 끌어안고 꺼진 등에 불을 밝힌 여성이다"며 "고증 자료가 턱없이 부족해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영웅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자부심으로 뿌듯함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최원종 작가는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내마음의 삼류극장' 으로 등단했다. 그는 2011년 작가에서 연출자로 변신해 '에어로빅 보이즈', '헤비메탈 걸스' 등 자신이 쓴 작품을 직접 연출했다.

이병욱 인천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과 김종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윤성주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은 "12년 만에 성사된 합동공연에 참여하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4개 단체가 각각의 뛰어난 전문영역을 극대화해 하나로 융합, 종합공연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좋은 협업이 됐다"는 참여 소감을 밝혔다.


▲김란사의 100년 후 꿈, 현실로 승화.

"저 별까지 헤엄쳐 가자" 소녀 란사의 제안에 소녀들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친다. 그 때 커다란 고래가 나타나 소녀 란사를 태우고 하늘을 날아 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성인이 된 란사, 10년의 유학 생활을 마쳤지만 그녀 앞에는 풍전등화인 조국과 말라가는 민중이 기다린다. 일제의 횡포는 '두꺼비'로 표현된다.

두꺼비들에 죽임을 당한 고래, 란사는 폭풍을 이기며 등불에 불을 붙여 높이 치켜든다.

이화학당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란사, 교육은 곧 조국 독립이라는 신념이 소녀 유관순의 마음에 불을 당긴다. "선생님처럼 자신의 삶에 등불을 켜고 싶다"는 소녀 유관순의 다짐. 헤이그 특사 파견 실패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고종, 김란사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고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워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하지만 갑작스런 고종의 붕어와 두꺼비의 집요한 방해. 여기에 남편과 자신을 돕던 여성마저 죽임을 당하게 된다.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의 줄거리다. 5m 높이에 12m에 달하는 거대한 고래 위에 올라 별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은 동화적 볼거리로 가득하고, 창경궁이 격하된 창경원의 동물원 모습이 시각적 쾌감을 준다. 강량원 총연출은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공연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입체적인 김란사의 생애를 보여주기 위해 총 3명의 배우와 2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선다. 꿈으로 가득 찬 소녀시절의 무용수는 김윤서가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춤을, 성인 김란사는 무용수 김도희가 맡아 의연하고 결의에 찬 몸짓으로 그녀의 삶을 표현한다.

유학 후 꿈을 품고 귀국하는 20대의 김란사는 배우 이수정이 연기하고, 탄압하는 일제에 대항해 투쟁과 교육의 길에서 혼란해 하는 30대의 김란사는 관록의 배우 강성숙이 분한다.

또 고종의 밀사로 활약하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는 40대의 김란사를 배우 강주희가 열연한다.

강주희는 "김란사 열사를 알아가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먹먹해지는 동시에 무척 행복했다"는 소감을 나타냈다.

인천문화예술회관은 이번 공연에 '광복회'를 비롯해 독립유공자와 유족, 문화소외계층 300여 명을 초대할 예정이다. 관람연령은 8세 이상이며 예매 문의는 032-400-2000, 1588-2341이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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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는

日·美서 공부 … 유관순에 "조선 밝히는 등불 되어다오" 가르침



김란사는 187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893년 인천 감리서 책임자인 하상기와 21살에 결혼해 인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화학당을 찾았지만 기혼자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절당했다. 한밤 중 프레이(Lulu E. Frey)학당장을 찾아가 '나의 인생은 이렇게 한밤중처럼 깜깜합니다.

내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입학허가를 받았다. 자비로 공부하고 하인 없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생활할 것을 다짐 받은 후 입학을 허가 받았다.

김란사는 1895년 일본 게이오의숙에 자비로 유학했고, 1897년 미국 하워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워싱턴 테코스네 학원에서 공부했다. 1900년 오하이주 웨슬리언대학 문과에 입학해 6년 만에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910년 총교사(교감)로 이화학당에 재직하면서 매일학교(공오소학교/상동교회 내), 애오개 학교(중앙여자 중·고교/추계여술대), 서강여학교, 한강여학교 등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았다.

이화학당 학생 단체인 이문회(이화문학회)를 지도하면서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고 말하며 이문회 가입을 권유했다. 1918년 고종황제로부터 의친왕과 1919년 6월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붕어하자 계획이 중단됐다.

그러나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을 계기로 다시 김란사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됐다.

3·1운동 직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김란사는 동포가 주최한 저녁식사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선교사 베커는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1995년 '여성의 애국정신을 고취했다'며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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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사의 남편 '하상기'는

인천서 공직생활 … 일제 수감생활 1년 만에 세상떠나


하상기(河相驥)의 생졸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고종과 태어난 해가 같은 1852년으로 기재한다. 하상기는 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인 한성부 서부 반송방 지하계에서 천인(賤人) 신분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다.

1905년(광무 9) 7월18일자 일제문서 비1205호에는 '從二品 陸軍參領 河相驥 當五十三年'(종2품 육군참령 하상기 당오십삼년)이라고 밝힌다.

하상기는 1899년(광무 3)에 경무관을 지내던 중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 주임관 6등에 서임됐다. 1902년(광무 6)에 경무청경무국장에 임명됐다가 다시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이 됐다.

1903년(광무 7)에 고종의 교지(敎旨)를 받고 난 이후 아들인 하구용(河九鏞)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河緯地)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같은 해 일본 주재 공사관(公使館)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광무 10)에 농상공부공무국장(農商工部工務局長)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행적이 묘연하지만 독립운동 중 1919년 일제에 잡혀 1년간 수감생활 후 이듬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