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 고병희(왼쪽) 장인과 장남 최용철씨가 가게 앞에서 웃고 있다. /사진제공=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김윤섭

 

▲ 고병희 장인의 장남 최용철씨가 닭을 튀기고 있다. /사진제공=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김윤섭

 

▲ 갓 튀겨나온 수원 매향통닭. /사진제공=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김윤섭

 

 

▲ 고병희 장인이 꽃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김윤섭

 

닭 잡는 일 백정 취급하던 70년대
친정아버지 설득해 연 가게 대박
큰불 여러번 … 사기 당해 나앉기도

전라도 무쇠솥·당일잡은 닭만 사용
49년간 단일메뉴 원조통닭 고집
10년 전부턴 장남에게 비법 전수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네~수원 왕갈비 통닭입니다."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의 흥행은 고스란히 수원의 대표 먹거리 왕갈비와 통닭의 열풍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49년간 한자리에서 '가마솥 통닭' 하나만을 고집하며 변함없는 맛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매향통닭'이 주목받고 있다. 경기도 최초의 통닭집, '통닭'의 장인을 수원에서 찾았다. 여섯 번째 발견, 고병희 장인을 소개한다.

#Since 1970. 수원 통닭골목 원조 터줏대감

치킨 가맹점 2만 점포, 최근 편의점과 외식 업체에서 판매하는 치킨 메뉴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치킨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50년 가까이 한결같은 맛을 고수하며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통닭 고수들도 '매향통닭'의 고병희 장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고 장인은 1970년 11월, 이곳 경기도 수원시 남수동 일대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그의 차남의 이름을 따 '용일 통닭'으로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었다. 이후 지역 명에서 따온 '매향통닭'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수원의 대표 명물로 자리하게 됐다. 나중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 매향통닭은 사업자등록 상 경기도 최초의 통닭집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70년대만 해도 닭은 귀한 식재료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치킨'의 형태를 갖춘 기름에 튀긴 닭요리는 보기 드문 요리였다. 당시 수원천 일대로 재래식 도계(屠鷄)가 한창이던 시절, 하천 위로 쌓인 생닭을 유심히 지켜보던 고병희 장인은 처음으로 닭 장사를 결심하게 된다.

"도계 법이 생겨나기 이전, 주로 닭을 잡을 때는 하천 같이 물살이 내리는 곳 주변으로 작업이 한창이었죠. 하천 일대로 시장이 생겨났고 갓 잡은 신선한 닭을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도계라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데다 혐오스럽기까지 해서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요. 생활력하면 빠지지 않는 제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닭을 팔아 우리 가족 모두 배불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그날로 장터에 나가 시장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시집 온 고병희 장인은 젖도 못 뗀 아이를 업고 시장 조사에 나서야 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당시만 해도 반 백정이나 다름없던 닭 잡는 일에 장사꾼으로 나서는 이들은 없었고 고 장인은 당장에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닭 장사를 하겠노라 선전 포고 했다.

"처음에는 펄쩍 뛰시면서 반대하셨죠. 아녀자가 험한 일을 하는 것이 못 마땅하셨을테죠. 하지만 긴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냈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통닭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린 틈도 없이 닭을 잡고 또 잡았다. 당시만 해도 변변한 가재도구가 없어 겨울이면 냉수에 손이 퉁퉁 불어가며 작업을 해야 했다. 얼마나 추운지 밥에 물을 말으면 금세 얼어붙어 살 얼음 밥을 먹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연료 또한 마땅찮아 석유로 불을 지피게 되면서 가게에 큰 불이 난 것도 여러 차례였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고 장인은 1~2시간 쪽잠으로 피로를 달래 가며 버텨왔다.

"한 번은 친정아버지가 가게에 찾아오셨어요. 시퍼런 저의 손을 보시더니 한약방으로 무작정 끌고 가셨죠. 침을 맞고 곯은 피를 빼낸 뒤 당신이 직접 구해오신 쇠똥을 발라 주셨어요. 걱정을 많이 하셨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로 가게 안은 온종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덕분에 고 장인의 통닭집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달콤한 보상도 잠시, 그에게 이내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도계 법이 바뀌면서 더 이상 하천에서 닭을 잡을 수 없게 됐어요. 도계장을 지을 요량으로 좋은 땅을 구하러 다녔고, 매교동 일대에 땅을 샀었죠. 그러나 등기부등본이 없는 땅이었고 결국 사기를 당해 졸지에 길거리로 나 앉는 신세가 됐습니다. 충격으로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게 끝난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의 곁엔 오매불망 그를 바라보는 세 아이가 있었기에 일어서야만 했다.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더 악착같이 장사를 해갔다. 그렇게 49년, 테이블 세 개로 시작했던 '매향통닭'은 200석 가까이 되는 대한민국 대표 '통닭집'으로 우뚝 서게 됐다.

#40년 단골·3대가 즐기는 변함없는 맛

50여년의 시간 동안 매향통닭을 중심으로 많은 통닭집들이 생겨났고, 지금은 수원의 대표 관광지로 불리는 통닭거리가 형성됐다. 그럼에도 매향통닭을 최고로 꼽는 데는 고 장인만의 50년 노하우와 고집스러운 운영 철칙에 있었다.

"단일 메뉴 하나만을 고집하는 게 저희 집 통닭 맛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전국에서 유일하게 양념통닭을 하지 않는 집이 매향통닭입니다. 하나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에 다른 종류의 통닭은 생각하기 어려웠고, 오로지 가마솥 통닭 한 가지만 고집스럽게 튀겨왔습니다. 또 아직까지도 매향통닭이 변함없는 맛을 내는 것은 직원 손에 맡기지 않고 지금도 주인이 직접 튀기기 때문이지요."

원조 가마솥 통닭, 매향통닭은 전라도 무쇠 솥 장인으로부터 공수해 온 솥과 하루 세 번 들어오는 그날 잡은 생닭만으로 고 장인 특유의 손맛으로 염지해 바로 튀겨 낸다. 천천히 식는 가마솥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200도가 훌쩍 넘는 온도에서 튀겨 낸 매향통닭의 맛은 쫄깃한 식감과 육즙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오랜 시간 남녀노소 온 국민의 영양 간식으로 큰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매향통닭의 맛을 보기 위해 3대가 방문해요. 더러는 40년째 변함없이 찾아 주시는 단골손님들도 있지요. 한 번은 캐나다에서 귀국한 손님이 캐리어를 끈 채로 오셔서 매향통닭을 사 가지고 가신 손님도 있었습니다. 여기 통닭 맛은 정직한 맛이 난다고 한 손님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지탱해 올 수 있었던 힘입니다."
올해로 76세가 된 고병희 장인은 10년 전, 언론사 기자로 지내오다 일을 그만두고 돌아온 장남 최용철씨와 함께 매향통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3형제가 모두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죠. 엄마로서 아들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는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내심만 있다면 어떤 시련이 와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자신이 있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