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공공미술이 흔한 말이 됐다.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도시 웬만한 건물 한쪽에는 조형물이 들어섰다. 깊은 뜻 알 수 없어도 예술작품이란 건 얼추 알아차린다. 작품이 흔해지면서 논란도 잦다. 도시 흉물, 애물단지는 단골 메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단 비난도 쏟아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며 권리다. 이런 공공미술 작품은 전국적으로 대략 2만 점에 이른다.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힘입어서다.
공공미술은 말 그대로 공적 영역이나 커뮤니티를 위한 예술이다. 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미술을 위한 지분 투자'와 '공공장소의 미술(Art in Public Place)' 제도에서 비롯됐다. 지분 투자 정책은 50개 주 중 절반가량에서 시행되고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예산의 1%가량을 공공미술에 쓰도록 하며, 작품 제작과 설치 또는 전시, 자문 등은 커뮤니티 몫이다.

이런 공공분야 정책은 미술 분야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작품 규모는 물론 다양성과 창조성 등이 한층 두드러졌다. 시대 맥락을 반영한 환경미술, 대지미술, 사운드아트와 역사화(歷史畵)등이 잇따라 선보였다. 코즐로프의 지하철역 벽화, 아담스가 버스정류장에 설치한 정치메시지, 베이카가 LA강변 콘크리트 담장에 그린 역사화 등이 좋은 예다.
10년 남짓 지난 뒤 한국사회 역시 비슷한 제도를 도입, 현재진행형이다. 하나, 제도는 비슷할지언정 양상은 사뭇 다르다. 작품 총량(總量)은 늘지만 질(質)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삭막한 도시에 예술을 보탠다는 취지는 작가와 물주, 거간꾼과 사이비판관 등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집요한 노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공정성 담보를 위한 일련의 방책 또한 무력하다. 예술을 다중(多衆) 영토로 확장한다는 본디 취지는 빛바랜지 오래다.

상황이 이리 된 건 공공미술제도 시행 과정에서 '예술가 복지'와 '더 많은 작품'만 부각됐을 뿐, 정작 중요한 것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경험에 비춰볼 때 공공미술의 핵심 요소는 공적자금과 공적 공간, 공중(公衆)이라는 '3공(公)'이다. 한마디로 고도의 공공성이 구현돼야 한다는 건데, 궁극적 좌표는 '모두에게 이로움(common good)'이다. 시민참여와 개방성, 지속가능성 등은 이를 위한 필수조건일 터, 이를 간과한 일련의 제도 손질은 결국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