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합니다, 열정을 그리는 '발'이라서
▲ 임인석 구족화가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채색하고 있다.

 

▲ 만파식적(2003作)- '만파식적'이란 대금을 불어 문무왕을 깨우고 전쟁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작품이다.

 

▲ 가슴계곡(2005作)-싸늘하게 스치는 외로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울부짖는 늑대와 뜨거운 열정과 희열의 폭포수가 내리는 모습이다.

 

▲ 제3의눈(2005作)-해탈과 집착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으로 내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 자화상(2006作)-험난한 산을 힘겹게 넘어온 작가 본인의 모습을 추상화했다. 가슴에 핀 꽃은 희망을 상징한다.
▲ ▲장인의 편지
▲ ▲장인의 편지

 

후천성 1급 뇌성마비로 전신 못쓰자
그나마 자유로운 발가락으로 '슥슥'

섬세한 붓놀림에 추상화풍 독보적
국내외협회 정회원으로 공식활동중



섬세한 붓 터치로 그려낸 절망과 고독으로 뒤엉킨 초현실세계는 여느 평범한 화가의 작품인가 싶었다. 작품만큼이나 뒤엉킨 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나서야 손이 아닌 왼발로 힘겹게 쥐고 있던 붓을 뗀다. 손보다 발이 능숙한 족필화의 명인을 평택에서 찾았다. 다섯 번째 발견 임인석 장인을 소개한다.

●발로 그리는 세상

"삶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두 손을 못 쓰기 때문이 아니다. 이 가슴의 열정과 불꽃을 나의 가장 아래인 발로써 피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순수했을 유아기때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고 내 생애 가장 많은 꿈들이 피어오를 때 나의 것이 아니라며 접고 또 접어야 했다." <임인석 작가 노트 내용 中>

구족화가는 선천적 또는 불의의 사고로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들 가운데 입(口)과 발(足)로 회화 작업을 하는 이들을 통틀어 호칭하는 말이다. 대중들에게 구족화가는 낯설지 않다. 매스컴을 통해 그들의 업적이나 전시 활동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들이 가진 신체적 장애가 결코 작가로서 걸림돌이 아니란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방위적인 활동과 수준 높은 작품들은 대중들을 매번 놀라게 만든다.

임인석 장인 역시 국내에서 으뜸가는 구족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발을 활용해 회화 작업 활동을 하는 족필 화가로 주로 아크릴, 유화 작품을 그려오고 있다. 예리한 묘사력과 손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한 묘사 감각은 그를 한국의 '프리다 칼로'로 불리게 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태생으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작품 활동을 해온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다. 임 장인은 칼로와 닮은 점이 많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 돌도 채 지나지 않았을 나이에 해열 주사를 맞은 뒤 갑작스럽게 찾아온 쇼크로 후천성 1급 뇌성마비 판정을 받고 신체 장애자가 됐다. 뇌성마비로 의사소통이 어려워졌고 두 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급기야 마흔이 넘어 전신까지 번진 마비 증상은 휠체어가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림을 시작한 건 4살 때부터였어요. 신체부위 중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 발가락이다 보니 부모님께서 발에 필기구나 화구를 끼워 주시면 습관처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달력과 광고지 등 남는 이면지는 늘 임 장인의 차지였다. 낙서 반, 그림 반, 시도때도 없이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아 바깥에 나가기보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았죠. 그러다 보니 그림은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 주었습니다. 우연찮게 제 그림을 본 사람들은 칭찬 한 마디씩을 꼭 하곤 했습니다. 특히 중학생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전문적으로 그림 배워보기를 권유하셨고 옆집에 살던 한 이웃은 도화지를 가져와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그리기에 점차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임 장인은 보다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 기법과 기초 과정을 배우기 위해 우편 수업을 통한 인물드로잉아카데미와 직접 미술교사가 가정을 방문하는 형태의 기초 회화 수업을 받게 됐다.

이후 국내 구족화가협회와 세계구족화가협회의 정회원이 된 그는 공식 활동에 나서게 된다. 1992년 10월3일 하늘이 열린 그날,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기념비적인 데뷔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구족화가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회원사에서 카드나 달력 등 인쇄 판매용에 새겨 넣을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종종 강단에 서거나 학교 수업 활동에 참여하며 아이들에게 연예인 인기 못지않은 선생님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기존의 저의 작품들과는 달리 고양이나 강아지, 시골 풍경이나 꽃길 같은 따뜻한 파스텔 톤의 화풍으로 작업을 해요. 구족화가협회에서 제작하는 달력에 작품을 싣기 위해서는 어둡고 암울한 작품보다는 아무래도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이 좋겠죠? 구족화가들의 인쇄물을 구입하신 분들이 용기를 얻게 됐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보람됩니다."

●긍정의 힘

임 장인의 작품들은 대개 섬뜩하고 날 선 소재들이 등장한다. 인간 내면세계에 잠재된 어두운 이면과 밝은 채색, 강렬한 붓 터치가 대조를 이루면서 초현실주의 관점으로 풀어낸 임 장인 특유의 추상적인 화풍은 구족화가들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대표작 '자살과 죽음의 아틀리에'나 '만파식적'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죽음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들을 극복하고 극복하지 못한 원혼들에게마저 위로를 전하는 작가의 따뜻하고 순수한 바람들이 녹아져 있다.

임 장인이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역시 진솔된 작품을 통해 감상자와의 교감을 이끌어 내는 것에 있다.
"공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감상자들과 함께 작품의 감정 흐름에 따라 춤도 추고 호흡을 유도할 수 있도록 솔직한 작품을 완성해 내는 것이 철칙입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45년간 발에서 붓을 놓은 적 없는 임인석 장인에게 물었다. 몸이 굳는 고통에 시달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금도, 어쩌면 즐거웠던 순간보다 힘들었던 순간이 더 많았을지 모를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물었다.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신체의 장애가 말 그대로 장애가 돼 삶의 벼랑 끝까지 몰고 가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없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어요. 성숙을 얻기 위해서 분명 시련은 필요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저 역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젠 저도 혼자가 아니니까요."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