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지난 주 어느 날 한참 바쁜 터에 스마트폰 SNS 창이 켜졌다. '대학가에 붙은 대자보'라고 하는데 붉은 글씨의 '태양왕'만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요즘 기세를 올린다는 '위인맞이환영단'이나 '백두칭송위원회'의 그것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북에는 태양궁전이라는 데도 있으니까.
▶며칠 지나고서야 그게 아님을 알았다. 군대를 다녀 온 한 복학생이 대학가에 내건 대자보라는 것이다. 발칙하게도 제목부터 '문재인 왕씨리즈'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해 나가는 위대한 업적에 취해보도록 하자'며 운을 떼고 있었다. 대자보 형식임에도 '반대', '투쟁' 등은 보이지 않고 반어법을 차용한 현란한 풍자시였다. 그것도 감히 이 정부의 허리를 이루고 있는 '전대협' 간판까지 내걸고서. 어느덧 100여개 대학들에까지 나붙었다고 한다.
▶대자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등장했다. 당 기관지 등을 장악한 류사오치(劉少奇) 등 실권파에 맞서 홍위병 등 조반파가 대중 동원의 선전수단으로 사용했다. '류사오치는 자산계급 노선의 제1호, 덩샤오핑은 제2호' 같은 내용이었다. 지난 5월 베이징대학에도 반 시진핑 대자보가 붙어 비상이 걸렸다. 종신집권 움직임에 대해 '한입에 달을 삼키고 또 한입에 해를 삼키려고 하다니'라고 비판했다.
▶풍자시로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이 고전으로 꼽힌다. 을사오적에 빗댄 오적은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관료, 재벌을 말한다. '서울이란 장안 한복판에 다섯도둑이 모여 살았겄다'가 그 시작이다. '바야흐로 단군이래 으뜸/으뜸가는 태평 태평성대라/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경제왕 문재인'편에서는 '마차가 말을 끄는 기적의 소득주도 성장'이라고 해설을 달았다. 각론에서는 '최저임금 8350원, 소상공인들을 혼내고 알바들을 영원히 쉬게 해주시었다'란다. 내로라 하는 대논객들도 못따라갈 정도다.'전 국토를 태양광 패널로'의 '태양왕'편에서는 '전기세 2배, 전기 끄고 집에서도 촛불혁명'이란다. '외교왕'에서는 '감비아와 북핵 협조, 한·감동맹 든든', 'A4용지 외교술' 등을 들고 있다. '인사관리 총책임자 민정수석 절대 해고 안해'는 '고용왕'편에 나온다.
▶아직 피가 더운 청년이어선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다. 마차가 말을 끌지, 말이 마차를 끌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일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나라에서 나랏일 추스린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