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경 논설위원

 

사람들은 왜 첫 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사람들은 왜 첫 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왜 첫 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 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첫 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후략). 시인 정호승의 '첫 눈 오는 날 만나자'의 중에서.
"첫 눈 오는 날 우리 여기서 만나자" 젊을 때 이런 약속을 한번쯤 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약속처럼 확실하지 않은 게 또 있을까? 첫 눈은 한 지역 안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다른 곳에는 오는데 우리 동네에는 안 오고, 우리가 만나기로 한 그곳에는 안 올 수도 있다. 특히 겨울에 막 들어서는 11월 첫 눈은 애매하기도 하다. 첫 눈이라 해야 할지 진눈깨비라 해야 할지 모호하다. 눈 비슷한 것이 내리면 무조건 만나자고 하지 않은 이상, 약속장소로 가기 망설여진다.

첫 눈 오는 날 약속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가수 수지를 국민 여동생으로 만들었던 영화 '건축학개론'를 보자. 새내기 건축학도 승민은 처음 본 순간 반한 음대생 서연과 동네를 걷다 아무도 없는 한옥집에 들어갔다. 마루에 앉아 첫 눈 오는 날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둘은 사소한 오해가 겹쳐 첫 사랑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 승민과 서연은 각자 다른 시간에 한옥을 다시 찾아 상대에 대한 감정을 되새길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현실에서도 첫 눈 오는 날 약속은 대부분 안 지켜진다.
11월의 마지막 주말인 24일 서울과 수도권에 첫 눈이 내렸다. 서울에는 기상청이 현 방식으로 관측을 시작한 1981년 이후 가장 많은 첫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권이 시끄러워졌다. 바로 청와대가 첫 눈이 오면 하기로 한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의 거취 결정 때문이다. 탁 행정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은 물론 취임 이후 각종 행사에서 탁월한 기획력으로 청와대 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여성비하 논란과 대선과정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드러나면서 야권의 사퇴 압력을 받아 왔다. 탁 행정관은 지난 6월 사퇴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첫 눈이 오면 놓아주겠다"며 사의를 반려했다.

서울에 첫 눈이 오자 야권은 탁 행정관 사퇴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탁 행정관에게 아직 할 일이 많아 계속 근무토록 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첫 눈 오는 날 약속도 결국 지켜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야권은 임 비서실장이 말한 첫 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올 겨울 첫 눈이 맞는지 먼저 물어보는 게 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