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지난주 칼럼에 수만 명의 유태인들을 구출했던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영사 스기하라 지우네(杉原 千畝, 1900~1986)에 관해서 쓰게 된 계기는 78년만에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 제막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스기라하 영사의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인물됨과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깊은 인식이 없었던 것을 이번 기회에 좀 더 알게 되었다. ▶일본 기후(岐阜)현의 사무라이(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유년을 보내면서 초등학교 때에는 전 과목 만점을 받으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성(서울)에 부임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험장에서 백지답안을 제출하고 도쿄 와세다 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아버지로부터 학비지원을 받지 못했던 스기하라는 고학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졸업을 앞두고 외무성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중국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익혔다. 1924년 외무성 서기로 채용되어 러시아와의 외교교섭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능력을 인정받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핀란드 공사관에 파견되었다가 일본이 군사첩보를 위해 리투아니아에 급조한 영사관에 영사관으로 발령받게 된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유태인들은 리투아니아로 대거 탈출해 제3국으로 도피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유일하게 업무를 보고 있던 일본영사관으로 몰려든 유태인들은 나치의 살육에서 구해달라며 눈물로 청원하면서 비자발급을 읍소했으나 독일과 군사동맹 체결을 앞둔 본국에서는 '불가' 방침을 통보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스기하라 영사는 28일 동안 하루에 20여시간씩 초인간적으로 비자를 작성해 발급했고 6000여명의 유태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외무성에서 해임된 스기하라는 번역 일과 무역회사 근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리투아니아에서의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서도 스기하라의 비자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의 문의에도 '해당자 없음'이라며 역사지우기로 일관했다. 1981년 스기하라의 비자로 생존한 소년이 도쿄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부임해 스기하라와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NHK와 일본 국내외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그의 영웅적 행동이 37년 만에 평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