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열 열정악단 지휘자
이나리 경기도립무용단원
▲ 양승열 지휘자가 무대에서 지휘봉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양 지휘자는 "열정단원과 평양무대에서 평화음악회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장소 협조 수원SK아트리움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양승열 열정악단 지휘자
음악을 읽어내는 '열정'으로 … 언젠가 평양무대를 이끌어내리라 

들썩이는 검은 머리, 리듬에 맞춰 꿈틀대는 눈썹, 푸근한 옆집 삼촌 같던 그가 지휘봉을 들면 무섭게 돌변한다. 강약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몸짓과 풍부한 표정만 봐도 마치 한 곡의 격렬한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합창곡이면 합창곡, 교향곡이면 교향곡, 오페라면 오페라 그의 손짓, 몸짓이 닿기만 하면 음악은 곧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열정을 지휘하는 지휘자 양승열(44)을 수원SK아트리움 무대에서 만났다.

"지휘자는 그저 지휘봉을 휘적이는 역할을 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음악을 듣는 것, 그것도 제대로 들어야 하는 직업이 바로 지휘자입니다."

매끈한 차림새와 내려쓴 베레모가 무척이나 근사해 보였다. 양승열 지휘자가 인사말을 내뱉자 나직하고 굵은 그의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지휘자보다는 바리톤 혹은 테너, 성악가에게 어울릴 법한 목소리였다.
전날 늦은 밤 공연을 마치고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전날의 피로감을 안기에 충분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뚝심 있는 에너지가 지휘자 양승열이 어떤 지휘자인지를 짐작케 했다.

수원 태생의 양승열 지휘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교 작곡과를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시립대학교(CUNY-Queens College)에서 관현악지휘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불타오른 학구열은 내친김에 미조리주립대학교(University of Missouri-Kansas City)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게 했다. 작곡가가 되려 했던 청년은 어느새 지휘자로서 면모를 하나하나 갖춰가기 시작했다.

"모차르트나 바흐 음악을 즐겨 들었어요. 이들처럼 작곡할 자신이 없었죠. 어설프게 작곡하느니 훌륭한 레퍼토리를 해석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불과 36살이 되던 해, 제1회 부카레스트 국제지휘콩쿠르에서 2위의 기록으로 입상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대회에서 오케스트라 단원 투표, 최다 지목을 받은 양 지휘자는 발군의 기량으로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때마침 부카레스트 콩쿠르 심사위원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지휘자 볼프강 되르너가 눈여겨본 양승열 지휘자에게 '칸느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제안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부카레스트 콩쿠르 당시 볼프강 되르너 감독과 음악적 견해로 마찰을 빚었었죠. 그걸 인상 깊게 여겼던 것 같아요. 영화제로도 유명한 칸느 곳곳의 대형 전광판에는 저를 소개하는 영상이 내 걸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죠."

양 지휘자는 귀국 후 서울오케스트라, 서울필로체임버오케스트라, 대전 벨아르코오케스트라, 김자경오페라단 등을 거쳐 현재는 그가 직접 창단한 오케스트라, '열정악단'을 이끌어 가고 있다.

"최고의 단원들로만 구성된 열정악단에서 열정은 한자어 그대로를 사용했죠. 일본이나 중국 등의 진출을 염두한 오케스트라의 이름이기도 해요. 먼 훗날 열정악단이 판문점이나 평양 무대에서 평화음악회를 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를 거쳐 간 세계 각지의 단원들은 양승열 지휘자를 두고 '열정' 그 자체라고 부른다. 음악 앞에서는 좀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를 수식하기에 '열정'만한 단어는 없다.

"최근에 샤머니즘에 관심이 생겼어요. 신이 내 몸안에 들어와 영혼을 지배하는 것처럼 베토벤의 곡을 연주할 때는 베토벤이 들어와야 하고 모차르트 곡을 연주할 때는 모차르트가 제 몸안에 들어와 있어야 하죠.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작곡했을지를 고민해야 제대로 된 지휘를 할 수 있습니다."

#해시태그 토크
#열정악단 #열정지휘자 #사운드비주얼라이징(Sound Visual Rising)
한 언론사의 기자가 제 공연 모습을 보고 '사운드 비주얼 라이징(Sound Visual Rising)'이라고 하더군요. 지휘하는 모습에서 소리가 눈으로 보인다는 의미로 지어준 단어입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선이 아름답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이나리(28) 경기도립무용단원의 몸짓 표현이다.이나리 무용수가 정기공연을 앞두고 연습하고 있다./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 '선이 아름답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이나리(28) 경기도립무용단원의 몸짓 표현이다.이나리 무용수가 정기공연을 앞두고 연습하고 있다./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이나리 경기도립무용단원
감정이 몰입된 순간의 몸짓 …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는 중이죠

한 몸인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동작, 같은 소리를 내는 단상 위 여인들. 신명 나게 쏟아내던 오고무 난타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55회 수원화성문화제 개막식에서 선보인 국악공연, '화락和樂 지난날이 부르고 다가올 날이 답하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오고무 공연 무대는 여느 걸그룹의 '칼군무'를 방불케 했다.

이 무대 중심에 이나리(28) 경기도립무용단원이 서 있었다. 한국무용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그녀, 무용수 이나리 단원을 공연 연습이 한창인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만났다.

"저의 공연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할 수 만 있다면 돈보다 값진 것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단아한 그녀의 모습이 마치 신윤복의 '미인도'를 떠올리게 했다. 한국 고전 미인상이라 하면 이나리 단원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무대에서만큼은 대범하고 카리스마 있던 그녀도 막상 인터뷰 자리는 익숙지 않은 듯,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소개를 부탁하자 돌아온 답변이 인상적이다.

"무용을 사랑하고 무용할 때만큼은 행복한 경기도립무용단원 이나리입니다."
무대에 설 때 가장 행복하다는 '천생' 무용수 이나리 단원은 현재 경기도립무용단에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무대에 올라 '우리 무용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미국, 유럽 등등 세계 어느 무대에서든 우리 한국무용에 대한 반응이 뜨겁습니다. 해외 이주민 분들은 물론 본토 현지인들도 경기도립무용단에 박수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경기도 수원에서 나고 자란 이 단원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우연히 보게 된 경기도립무용단의 공연을 보고 꿈을 키워왔다.

"유년시절을 수원에서 보낸 저는 경기도립무용단의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길게 늘어진 한복 치마를 입고 추는 아름다움에 반해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키워 온 경기도립무용단원의 꿈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뤄냈다. 벌써 입단 4년 차에 접어든, 제법 베테랑 무용단원이 된 그녀는 세계 어떤 무대보다 지난 55회 수원화성문화제 무대를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꼽았다. 그 후일담으로 들려준 얘기들은 의외였다.

"개막 공연 화락 무대에서 오고무 연주를 맡았죠. 계단식 단상 위에서 하게 된 공연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무사히 마치긴 했어도 잊지 못할 공연이 됐습니다."

완벽한 공연 무대 뒤 이 단원이 겪었을 고충은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최근 이 단원은 경기도립무용단의 대표 무용극 '황녀 이덕혜'의 주연을 맡아 연일 공연 연습에 매진해 오고 있다.

"오로지 이덕혜 생각뿐입니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한 인물의 삶과 감정들을 몸짓 하나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 몰입을 위한 노력들을 해야만 합니다. 감정에 몰입된 순간 다시 이나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좋은 연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이나리가 아닌 이덕혜여야만 합니다."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 그녀는 경기도립단원의 꿈을 이룬 지금도 여전히 행복과 감동을 주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

"꿈을 이뤘지만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전하는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꿈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공연장에서 관객 분들을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해시태그 토크
#가족 #노력 #감정(웃음)
노력은 누군가에게도 그렇고 저 스스로도 그렇고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키워드로 꼽았고 가족은 특히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자 저의 영원한 관객이기에 키워드로 꼽았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