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 시대 아픔 견뎌낸 母情
▲ '맹순할매의 억척 기도일기' 한맹순 여사가 자신의 일기장을 읽고 있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 한맹순 여사가 자신의 일기장을 펼쳐보이고 있다.

▲ 한맹순 여사와 아들 이해학 목사가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들 이해학 목사 민주화 뛰어들어

긴급조치1호 항거 징역 15년 선고

당시 상황·심정 일기장에 고스란히

"박종철 살려내라" 생생한 외침"

민주화·통일에 대한 신념 담아

올해로 100세 … 3년전 치매 판정

70대 백발이 된 아들과 같이살아

그 날의 역사는 아직 또렷이 기억





조마리아 여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 안중근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위업을 이룬 이들의 뒤에는 항상 '어머니'라는 위대한 세 글자가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내 어머니가 내 아들 딸들에게 보여준 절대적인 믿음과 포용은 '모정'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맹순 할매'도 그랬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격동의 시대, 민주화를 쫓아 불구덩이 속을 제 발로 뛰어든 아들 이해학 목사에게 단 한 번의 믿음도 저버린 적 없었다. '내 착한 아들'의 부당함이 하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서툰 맞춤법으로 써 내려간 일기는 어느새 40년의 세월을 넘겼다. 오랜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간 일기장 속에는 지난날의 뼈아픈 역사 그리고 '모정'이라는 두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역사의 풍랑을 견뎌 온 억척 할매, 한맹순 여사는 올해로 100세가 됐다. 3년 전, 치매 판정을 받은 한맹순 여사와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이 된 아들 이해학 목사는 생애의 추억들이 머문 이곳, 남원에 내려와 지내고 있다.

지금도 아침이면 집주변 잡초 제거에 나설 정도로 건강한 모습의 '맹순 할매'는 더이상 일기를 쓰지 못할지언정 그 날의 역사들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헌법을 고치는 일 잘못했다고 편지를 써서 부쳤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해학이는 15년을 가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하시더라.

나는 그 말씀 듣고 우리 아들이 어려운 사람 돕는데 앞장서는 사람인데 무슨 죄가 있어서 15년 형을 받았는가 너무도 답답했다.(중략)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들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른말했기 때문이지요.'(<맹순할매 억척기도 일기> 中에서)

1974년1월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이해학 목사를 비롯, 권호경, 김동완, 허병섭, 이규상, 박창빈, 김성일, 인명진 등 8명의 성직자들은 정면 항거에 나섰다.

긴급조치 선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서명운동을 위한 시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기도회가 끝난 후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을 벌이다 그 자리에서 체포돼 군법 회의에 회부됐다.

이해학 목사의 모친이자 <맹순할매 억척기도 일기>의 글쓴이 한맹순 여사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 징역 선고를 받았던 당시 상황과 심정을 고스란히 일기장에 써 내려갔다. 주변의 우려와 유언비어들이 맹순 할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그 틈에도 아들에 대한 믿음만큼은 놓지 않았다.

"징역형을 15년 선고받고 나서 그것보다는 빨리 나올 거다 라며 애써 위로한 이웃들에게도 당차게 외치던 어머니셨죠. 15년이 웬 말이오 내 아들 곧 나옵니다 라면서요.(웃음)"

'내가 이까짓 최루탄 가스 때문에 집으로 간단 말이냐.

내가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야 하지 않느냐. 생명을 끊어버린 악마들아 종철이 살려내라고 외쳤다.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제는 늙어서 소리도 지르기 힘들고 걸음도 힘없이 달음박질도 못하니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맹순할매 억척기도 일기> 中에서 87.2.7)

1987년1월14일, 누군가의 잘난 아들이었을 서울대생 박종철이 모진 고문을 받다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로 온 국민을 유린하고 분통을 터트리게 한 희대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현시대 와서 완장 꽤나 찬다는 이들도 당시 최루탄과 갖은 고문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내뱉던 시대였다.

작은 체구의 맹순 할매에게 최루탄은 '그깟 것'에 불과했다. 그도 종철이의 모친처럼 귀한 자식을 둔 '엄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 어머니의 일기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세상사에 무지할 것이라 생각했던 저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민주화와 통일이 이뤄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이 항상 박혀 있으셨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의 연세는 무려 70세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판문점을 허락받고 가는데 한국 정치가들이 자리를 바꾸어 버렸다. 북한 사람들이 왜 자리를 바꾸었느냐 우리는 만나지 않겠다고 가버렸다고 한다.

정치가들이 남북회담을 방해해 버렸다.(중략) 우리 목사님 해외동포들 만나서 통일 회담한다고 신문에 났다고 한다. 당신 종 통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통일을 위해 애를 버둥버둥 쓰고 있습니다.'(<맹순할매 억척기도 일기> 中에서 90.11.9)


1990년 7월26일 남과북·해외동포 3자의 역사적인 범민족대회 예비회담이 무산된 이후 그해 8월15일 평양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당시 통일 운동체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오고 가던 남한에서는 이견 조정을 위해 11월19일 이해학 목사를 포함한 조용술 목사, 조성우 평화연구소장 등 3인을 독일 베를린으로 급파했다.

밤새도록 이어진 3자 회담에서 이들은 범민련 이름 아래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이산가족을 알리는 것을 첫 번째 과업으로 삼았다.

흩어져 있던 가족의 생사를 아는 것만으로도 통일에 대한 열망을 키울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어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들을 구제할 공동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원폭피해, 강제징용, 야스쿠니 신사 합사 반대 운동, 정신대 문제 등도 해결 과제들로 논의됐다.

"일본은 65년 국교정상화로 지난날의 과오를 보상했다고 주장하고 있죠.

하지만 아직 북측은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자는 취지였지만 과업은 이루지 못한 채 감옥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을 '명분'으로 시차 적응 겨를도 없이 경찰차에 올랐다.

맹순 할매의 기도가 통했을까?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남북 관계의 정세 흐름이 바뀌면서 이해학 목사와 한맹순 여사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통일이 한 발짝 가까워졌다.

"좋은 날이 왔지만 치매를 앓고 계신 고령의 어머니는 이제 알지 못하십니다. 어머니 통일이래요 어머니가 늘 기도 하시던 통일이래요."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