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가곡 이수자 이건형

 

▲ 이건형은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가호 남창가곡 이수자다. 31살, 청년이고 아직 미혼이다. 생각이 깊기에, 꿈도 당차다. 얼핏설핏 말투에서 가곡의 기품이 베어 나온다. 남창가곡은 요즘 계절과 어울린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세상이 단풍으로 물들면 마루에 앉아 가곡을 읊어보는 옛 선비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렇게 이건형은 어제를 배웠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가꾸고 있다. 인천에 남창가곡이 흥얼거리는 때를.


용현초 시범 국악학교 선정 계기
부모님 졸라 학원서 민요로 시작
가곡 접하고 나니 '이거다' 싶어

서울로 가면 기회가 더 많겠지만
인천에 가곡 뿌리 내리고 싶어요


선비는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정중동의 행보 속에는 거침이 꿈틀거린다. 우보는 어리석음과 느림이 아닌 천천히라는 미학 속에서 다음의 행함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런 속에서도 잊지 않는 풍류는 시대를 감싸고 아픔을 함께 품으며 나라를 지탱했다. 생소하지만 우리의 핏속에는 가곡(歌曲)의 유전자가 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먹을 것을 나누는 가운데 저절로 가곡의 흥이 체득됐다. 그냥 잊고 있을 뿐이다. 이건형(31)의 '남창가곡'은 인천의 선비 정신과 흥의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이건형이 읊는 남창가곡 속에 가을이 짙어지고, 겨울이 재촉된다.

"'가곡'은 조선시대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인 시조시를 5장 형식의 선율에 얹어 노래하는 악곡 양식을 말한다." 2008년 간행된 <남창가곡> 이란 제목의 책 첫 문장이다. 인천광역시무형문화재 7-가호 남창가곡, 그리고 인천의 남창가곡 맥을 잇고 있는 이건형. 소리에 더해 가슴으로 대중을 감동시킬줄 아는 청년이다.

# 국악은 '새 놀이터' 였다

대여음, 1장 동창이 밝았느냐, 2장 노고지리 우지진다, 3장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중여음, 4장 재넘어, 5장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조선 후기 학자 약천 남구만의 작품이다. 전원생활의 풍류를 읊었다는 대표적인 권농가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속내가 담겼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시조를 가곡으로 읊으면 5분이 더 필요하다. 가곡은 가사, 시조와 함께 정가(正歌)로 불려지며, 범패, 판소리와 함께 한국의 3대 성악곡으로 꼽힌다. 정가는 조선후기 양반과 중인을 중심으로 하는 풍류객들의 대표적인 연주 악곡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음악이기도 했다.

가곡은 거문고, 가야금, 해금, 세피리, 대금, 장구 등의 줄풍류(세악) 편성으로 반주한다. 여기에 단소와 양금이 추가된다. 덧붙이자면 주로 한 사람의 노래를 반주하는데다가 방안이나 대청마루 등에서 연주하기 때문에 전체 음량이 크지 않다.

생소한듯 하지만 우리와 같이 호흡한 가곡, 이를 남성이 읊으면 남창가곡, 여성은 여창가곡이 된다.

책 남창가곡에는 "음악적 깊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음악인들의 노력과 영감들이 적층되어 우리에게 하나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그 음악적 언어의 의미와 상징을 하나씩 음미하고 풀어헤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니 가곡을 감상할 때에는 시간여행을 가듯이, 이름없이 사라져간 음악인들을 하나씩 조우하듯이 그 깊이에 조금이나마 빠져보아야 할 것"이라고 권했다.

이건형은 학교 교육의 열매다. 1998년, 개구쟁이 이건형은 늘 그렇듯 집 옆 초등학교에 갔다. 미추홀구 용현초등학교, 여느 동네처럼 용현초 역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서민 속에 담겨 있는 학교이다. 이 학교가 특별한 것은 이건형이 다녔기 때문이다.

4학년 이건형에게 기적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국악 시범학교로 용현초가 선정됐고, 담임교사이던 오점순 선생님의 보살핌 속에 이건형은 흥에 빠졌다. 또래 친구처럼 뛰놀고 말썽부리며 용현동 옛 토지금고 인근을 뛰놀던 이건형이 '배움'으로 엄마를 졸랐다.

"민요하고 싶어요." 반신반의하는 엄마, 어린 아이의 호기심이라 여겨 이건형을 국악학원에 보냈다. 당시 이건형 인생길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못했을터.

동인천 우리소리연구회의 현관문을 연 순간, 이건형의 가슴은 뛰었다. 사무실 한가득 장구와 피리, 가야금이 놓였고 이 속에서 민요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이건형의 소리 전수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민요를 시작으로 가곡을 배웠고, 가곡의 길을 걷게 됐다.

이건형은 "초등학교에서 배웠고, 담임선생님이 배우시던 국악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며 "이 곳이 놀이터였고 그냥 좋았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렇게 소리로 이건형은 중학교까지 용현동에게 보냈고, 국악고등학교에 이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갔다.

# 나 인천 사람이야

 


"인천 시민께 남창가곡을 알리고 싶습니다."
결단코 쉽지 않은 길이다. 특히 서울 옆 인천에서, 대중에게 생소한 남창가곡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시쳇말로 '시장이 좁다'.

그래도 이건형은 "내가 나고 자란 곳 아닙니까. 저 인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남창가곡에 빠진 인천을 상상해본다. 그 중심에 이건형이 읊는 남창가곡은 어떤 색이 더해져 인천시민을 행복하게 해줄까. 미추홀구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만난 이건형은 꿈과 열정이 가득했다.

우리 소리가 좋아 무작정 찾았고, 배웠고, 익혔다. 이건형은 하루하루 실력이 쌓였고, 주변에서는 이건형의 성장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 노래 공부의 첫걸음을 신춘화 선생님을 통해 백마루백팔로 익혔다. 표현법과 섬세한 음조, 구음법을 속 깊이 담았다. 그 때 남창가곡이란 소리를 권유받았다. "선비들이 했다는 호기심에 처음 남창가곡을 익히게 됐다"는 이건형, "바로 이거였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건형은 "일반 중학교를 거쳐 국악고등학교를 진학했고, 열심히 한 성과로 한예종을 들어갔습니다"라며 "우리 소리를 더욱 익혀 인천에 그 뿌리를 내리고 싶은 마음에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건형도 잘 안다. 인천보다는 기회와 가능성이 높은 서울에서 소리를 하는 게 조금 더 수월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형은 인천을 택했고, 그를 통해 인천 남창가곡은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인천시 무형문화재 남창가곡 이수자 이건형, 아직은 배움에 익숙한 나이지만 몇 년 후 이건형은 인천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기둥이다. 부모님과 지인들의 속깊은 응원도 이건형의 소리 배움에 큰 도움이 됐다.

"우리 아들 자기 앞가림은 잘합니다." 엄마는 늘 이건형을 걱정하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 험한 소리의 길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기에 든든하다. 그래서 대중에 생소하고 낯선 남창가곡을 하지만, 이를 반드시 인천에 알리겠다는 각오를 또 다지게 된다.

그는 "당장은 국립국악원 등 큰 악단에 들어가 소리를 소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속마음을 넌지시 비치지만 아직은 갈고 닦는 '익힘'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건형은 잘 안다.

이건형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인천에서도 시민들께 이런 좋은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라며 "인천에서도 실력과 함께 시민들의 귀와 소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는 것을 꼭 정착시키겠다"고 언급했다.

전수교육관 체험장에는 도림고 학생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우리 것을 배우겠다는 탐구로 붓칠을 하고, 나무를 깎는다. 심각한 표정에서 지루함을 읽을 수 없다. 가을과 체험장, 그 속에서 우리 것을 익히는 학생들. 이건형은 창 밖 이 풍경을 보며 "남창가곡 역시 이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자신했다.

/글·사진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