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승 혜초의 꿈, 바닷길 따라 펼쳐졌다
▲ 광저우 시내를 흐르는 오늘날의 주강의 야경 모습.

 

 

▲ 신라의 승려 혜초가 머물렀던 곳으로 추측되는 광효사(光孝寺).

 

▲ 고대 광저우의 무역항이었던 황푸고항

 

▲ 해상실크로드박물관에 전시된 송대의 선박 모형.

 

▲ 하이링섬 해상실크로드박물관에 있는 난하이1호의 발굴 현장

 

▲ 광둥성박물관의 신안유물선 특별전시 모습
▲ 7세기부터 등대 역할을 했던 회성사(懷聖寺)의 광탑

 

 


주강 흐른 광저우 해상교통 요충지

승려 혜초 최고사찰 광효사 머물며

황푸고항서 인도行 배 탔을 가능성

이슬람 성전 회성사 37m 광탑 우뚝

라마단이라 불린 고려인 신도 흔적

고려 신안유물선, 광둥성박물관에

해상무역 증거 도자·목간 등 전시

남송때 난파선 난하이 1호 인양도




광저우(廣州)는 중국 남부에 위치한 광둥성(廣東省)의 성도(省都)다. 광저우에는 중국의 4대 하천 중 하나인 주강(珠江)이 흐른다. 이 강의 하구만은 홍콩, 마카오, 선전 등과 인접해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광저우는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번성했다.

이러한 까닭에 당송(唐宋)시기에 북방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명청(明淸)시기에는 더욱 인구가 급증해 이들을 '객가인(客家人)'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아편전쟁 이후 많은 인구가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광둥 화교(華僑)의 주축을 이룬다. 광저우는 한(漢)나라 시기부터 항구로 발전한 이래 줄기차게 성장하였다.

명나라 때 해금정책에도 이곳만은 개방하였다. 2000여년을 한 번도 폐쇄하지 않았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이어온 도시인지라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상당수 있다.

당나라 때 지은 사찰인 광효사(光孝寺)는 신라의 승려인 혜초(慧超)가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나기 전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혜초는 인도에서 온 밀교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그로부터 밀교(密敎)를 사사(師事)받았다. 그리고 스승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시 밀교의 본향(本鄕)인 천축(天竺)으로 향하였다.

광효사를 들어서니 먼저 대웅전 앞의 거대한 보리수가 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여기저기 향내가 진동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당 앞마다 서너 개씩 향을 들고 저마다의 소망을 빌고 있다.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達摩大師)와 6조(六祖)인 혜능선사(惠能禪師)도 이곳에서 설법을 하였다고 하니 고승들의 영험함을 믿고 싶은 까닭인가.

혜초도 당시 최고의 사찰이었던 이곳에서 천축으로 가는 뱃길의 안녕(安寧)을 염원하였으리라.

혜초가 천축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탄 부두는 어디일까. 황푸고항일 가능성이 높다.

이 항구는 광저우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당송시대부터 명청시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해외무역항으로서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만큼이나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적은 많지 않다.

황푸고항은 퇴락한 어촌의 모습 그대로다.

몇 척의 나룻배가 개펄 위에 있고, 과거의 부두였을 곳에 만들어 놓은 전시용 배 한 척이 홀로 좁은 항구 터를 지키고 있다. 그 옛날, 광저우를 드나드는 입구에 있는 부두로 중시되어 온 곳이었음은 세월의 무상함에 묻힌 지 오래다. 부두 터에 세운 깃발만이 과거의 명성을 말해주려는 듯 바람에 펄럭인다.

항구 너머 야산에 있는 파주탑은 등대 역할을 하였고, 부두 앞에 있는 기념관은 세관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지금은 황푸고항과 해상실크로드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광저우에는 아시아인은 물론 아랍인들까지도 앞 다퉈 몰려들었다. 아랍인들이 늘어나자 그들만의 거주지인 번방(蕃坊)을 설치하였다.

이들을 통해서 광저우는 유럽에 칸푸(Khanfu)로 알려지고 이후 영국인들이 캔톤(Canton)으로 부르면서 별칭이 되었다.

아랍상인이 증가하자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 사원도 생겨났다.

'마호메트를 마음속에 품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회성사(懷聖寺)는 7세기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37미터에 이르는 광탑(光塔)이 있다.

흰 색의 원추형으로 지은 이 탑은 이슬람 지역에서 보는 탑인 미나레트와는 그 모양이 다르다.

탑 위에서 쿠란을 낭송하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이 탑에 불을 밝혀 아랍상인들의 배가 무사히 정박할 수 있도록 등탑(燈塔)으로써의 기능을 하였다.

광탑은 아랍상인들의 상업적 교역과 종교의 전파라는 두 가지의 이득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사원에는 우리 고려인의 흔적이 있다.

많은 이슬람교도의 묘비석 중 14세기에 살았던 '라마단(刺馬丹)'이라는 신도는 고려인이었다.

그는 광저우에서 지방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루가치는 원나라 때의 관직이다.

고려는 남송(南宋)때 활발하게 교역했다. 이때 광저우로 온 고려 상인이 사업으로 부와 명예를 차지한 후, 그의 후손이 그간의 명성에 힘입어 원나라 때 지방관에 임명되어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이슬람교도가 된 것은 당시 활발한 아랍상인들의 활동과 원나라의 우대정책에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원나라 때 고려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상실크로드에 관한 광저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려면 광둥성박물관이 제격이다.

이곳에는 광둥성의 자연과 역사, 지리와 문화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광둥을 총망라한 16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우리 탐사팀의 관심을 끈 것은 우리의 수중문화재를 소개하는 특별전이었다.

13-14세기 동아시아 문화교류를 살펴보는 이 전시는 우리나라의 신안유물선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해상무역활동의 결과물인 도자기와 목간 등 총 40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고대 한반도와 광둥성의 교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신안유물선 같은 난파선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해상실크로드의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보고(寶庫)다.

광저우 남쪽에 위치한 하이링(海陵)섬에는 해상실크로드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남송 초기에 도자기를 운반하다가 침몰한 '난하이(南海)1호'를 인양, 발굴하는 곳이다. 길이가 30미터가 넘는 이 배는 이제까지 발견된 송나라 상선 중 최대의 크기다. 이 선박에는 남송의 자기와 각종 물품이 8만 점이 넘는다. 시가로 10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광저우는 해금정책이 엄격하던 명대에도 동남아와 아랍 등지에서 오는 조공선이 드나들었다.

이후 유럽 각국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광저우는 청대에도 유럽과의 '공무역'이 허용된 유일한 항구였다. '황제의 남쪽 보물창고'라고 불리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중국어와 영어가 혼합된 '광둥 영어'가 통용될 정도였다. 아편전쟁 이후 항구의 위상은 상하이에 내주었지만, 세계적으로 분포한 화교(華僑)의 30%를 차지하며 오늘도 중국과 세계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