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9월인가 했더니 금방 추석이 다가온다. 이제는 명절하면 북새통을 이루는 인천공항 출국장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게 세태가 바뀌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요란했던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도 그새 많이 치유된 모양이다. 30~40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니 이미 56%가 "명절 증후군이 없다"고 답했다. 좋은 현상이다. 그 좋은 설 추석 명절을 왜 쓸데없는 허례에 시달려야 할 것인가.
▶명절 스트레스의 시작은 차례상 준비다. 조율이시(대추·밤·배·감의 순서),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좌포우해(포는 왼쪽, 젓갈은 오른쪽),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 이런 게 뒤바뀌었다고 조상 귀신님들이 숟가락을 던지기라도 하겠는가. 그 근본 취지는 '정성을 담아 차리라'는 것이다. 남의 눈 때문에 마지못해 차린다면 귀신들이 먼저 알 것이다.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내세우는 한 단체가 올 추석에 맞춰 좀 파격적인 차례상 모델을 선보였다. 제사상 대신 식탁을, 병풍 대신 실내 가림막 등을 이용하는 식이다. 유기·목기로 된 제기 대신 디자인도 세련된 평소 생활 그릇들에 담아 올린다. 뷔페처럼 여러 음식을 큰 그릇에 모아 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을 그 테마로 제시했다. 집집마다 예가 다르며 흉이 아니다는 얘기다. 조선 유학의 큰 봉우리인 퇴계 이황도 후손들에 가르침을 남겼다. "기름에 튀긴 과자(유과·정과)는 사치스러우니 제물로 쓰지 말라" 명재 윤증의 집안에서는 떡과 전, 유밀과를 올리지 않는다. "재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올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겨서다.
▶탈레반처럼 유학을 원리주의적으로 받들던 조선조에서도 여백은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메밀떡과 감자전을, 경상도에서는 문어와 돔베기(상어)를 올렸다. 전라도에서는 홍어, 제주도에서는 보리빵이 올랐다. 모두가 그 지방에서 흔한 물산들이다. 방방예문(方方禮文)이라고나 해도 될 융통성이다.
▶명절 연휴에 자손들이 나들이를 간다고 싫어 할 조상이 있을까. 여행 중 또는 해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상황도 흔하게 됐다. 뿌리를 잊지 말고 오래 기리자는 차례의 풍속이 족쇄가 돼서는 안되겠다. 공자의 참된 가르침은 망각하고 홍동백서 등만 강제하면 껍데기 유학이다. 차례와 제사는 가가예문이되, 뿌리를 되새기는 정성된 마음이 그 핵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