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까지 간 明 정화, 장보고 후예들이 도왔나
▲ 원형으로 복원된 정화 보선

 

▲ 일본제국이 그린 조선의 배. 정화보선과 흡사하다.(와세다대 소장본)

 

▲ 난징 룽장 보선 제작터 전경

 

 

▲ 중국의 실크로드기념관마다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홍보물.

 

▲ 난징 정화 보선 제작터 기념관에 있는 정화상.

 


明 영락제, 정화에 남해원정 지시

 

난징 룽장보선유지에서 배 만들어
수십척 배·2만명 병사 7차례 항해

정화 함대 배 '서양취보선' 일컬어
明 주원장 해금정책 '선박기술' 퇴보
韓 삼국시대부터 조선·항해술 우수
장보고 후예들 배 건조 참여 가능성


장쑤성(江蘇省)의 성도(省都)인 난징(南京)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이 도시가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 때다. 초나라는 이곳을 금릉(金陵)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유명해 진 것은 삼국시대 때다. 당시에는 건업(建業)이라 불렀는데, 오나라의 손권이 이곳에 도읍으로 정하고부터는 창장(長江) 이남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4세기 이후에는 동진(東晋)과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 남조(南朝)의 도읍으로서 더욱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다시 번창하였다.

중국은 송원(宋元) 시대를 거치며 왕성한 해상교역을 전개하였다.

동남아는 물론 페르시아 만의 아랍인들도 중국을 드나들었고 우리의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인 예성강의 벽란도까지 왕래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엄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폈다. 주원장이 해금정책을 편 것은 저장(浙江)성과 푸젠(福建)성의 연안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왜구와 결탁한 채 세력을 뻗치는 군벌 때문이었다.

이들이 기존세력들을 결집하여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후퇴를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명대 이전까지의 제국은 개방성과 교역을 통한 실리를 중시했다. 반면에 명나라는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울러 천자의 제국으로서 권위와 체면을 중시했다.

전 시대의 활발함에 비하여 융통성이 결여된 명나라의 대외정책은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夷蕃)의 갖가지 물건들은 모두 중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미 일상적인 생활필수품이 된 교역품들을 해금정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밀무역이 성행하고 해금을 반대하는 관리들도 이에 가담했다.

주원장을 이은 영락제는 선황(先皇)이 정한 해금정책을 깨고 환관인 정화(鄭和)에게 함대를 이끌고 남해원정을 추진토록 하였다. 정화는 윈난(雲南)성 출신의 색목인(色目人)이다. 색목인은 원나라 때 유럽이나 중근동 및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외국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의 조상이 몽골을 지원한 덕에 원나라를 건국할 때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이었다. 원래 성씨도 마흐무드(Mahmud)에서 따서 마(馬)씨였는데 영락제가 정(鄭)씨를 하사했다.

난징에는 환관이자 항해가인 정화가 배를 만든 곳이 있다. 바로 룽장보선유지(龍江寶船遺址)다. 이곳에서는 대략 길이가 오백 미터, 폭은 오십 미터 정도의 수로가 세 개 발견됐다. 정화함대의 보선 길이가 150미터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과연 충분히 제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로 끝에는 당시 크기로 복원해 놓은 보선이 우뚝하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대규모 선단을 꾸려 7차례의 항해를 실시했다. 그가 이끄는 함대는 한 번 출항할 때마다 수십 척의 배와 2만 명이 넘는 병사가 동원되었다. 이는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1세기나 빠른 것이었으며, 선단의 규모도 10배나 큰 것이었다.

정화가 항해한 곳은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실로 엄청난 항해였다. 그의 항해는 중화 중심의 조공질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육지로만 집중되었던 중국의 지리적 인식이 바다를 통해서도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확장됐다.

정화 함대의 배를 일컬어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이라고 불렀다. 서양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배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 보선이라고 하였는데 갑판 위에 집(屋)을 층층이 만들고 그 위에 돛을 달았다. 이러한 배를 안정적으로 운행하려면 배의 규모가 다른 배에 비해서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항공모함 수준의 크기가 되는 것이다. 실제 크기로 복원한 보선은 방향타(方向舵) 하나만 해도 11미터가 넘는다. 이러한 배가 수십 척씩 항구에 도착하면 그곳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우호적인 방문일지라도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정화함대의 보선을 찬찬히 둘러본다. 정화는 해금정책을 실시한 지 30년이 지난 후에 남해원정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해금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보선을 만들 정도의 선박기술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일까.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일제가 조선의 배를 그린 자료를 보면 정화의 보선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우리는 흔히 고대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중국이 월등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착오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황해를 장악했다. 백제의 어원인 '백가제해(百家濟海:많은 가문이 연합해 바다를 제어한다)'는 백제가 해상강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의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덕분이었다. 이러한 선박 제조와 운용기술은 상호간에 전승되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했다.

장보고의 해상 기술을 이어받은 고려는 1천 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硝馬船)과 과선(戈船)이 있었다. 과선은 뱃전에 창검을 꽂고, 뱃머리에는 철로 만든 충각(衝角)을 설치한 대형 군선(軍船)이다. 과선은 선체가 높고 크며 좌우로 4층의 옥(屋)을 세웠다. 고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원나라와 연합해 일본을 정벌할 때에 확실하게 나타난다.

원나라가 고려에게 3천-4천 석을 실을 수 있는 배 1천 척을 주문하자 고려는 단시일에 이를 완수했다. 특히, 고려가 건조한 배들은 송나라에서 건조한 배들보다 훨씬 견고하여 부서지지 않았다.

이처럼 뛰어난 조선술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에 조선시대에도 이순신의 거북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늘날까지도 조선강국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찌감치 중국 대륙을 오가던 장보고의 후예들은 선진적인 기술로 중국의 해운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해금정책 시행은 선박제조기술의 퇴보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화는 이제껏 유래가 없는 크기의 배를 건조했다.

이는 최고의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바, 자연스레 연안과 운하를 장악하고 있던 우리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해안 도시는 저마다 해상실크로드의 역사를 자랑하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접목해서 발전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정화는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내세우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정화와 관련 있는 지역이면 어느 곳이나 할 것 없이 그가 이끈 함대나 보선을 세우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