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호 논설위원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19세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국군대에 점령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먼저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국에게 함락됐다. 그 과정을 보자. 중국 관헌들은 1856년 10월 애로우호에서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체포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하나 사실 체포 시점에서 배의 선적은 중국이었으므로, 이는 영국측의 생떼에 가까웠다. 결국 영국은 고의적으로 사건을 확대해 전쟁으로 이어갔다. 6000여명의 영·프 연합군은 광저우를 가볍게 점령하고 중국과 톈진조약(1858년)을 맺었다. 이듬해 전쟁이 재발해 영·프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베이징에서 연합군은 살육, 방화, 강간을 저질렀다. 전쟁 결과인 '베이징 조약'의 중재를 담당한 러시아는 약은 꾀로 블라디보스톡이 있는 연해주를 차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해주는 간도처럼 조선의 영토였는데 말이다.
▶두 번째로는 1901년 서구열강과 일본 등 8개 연합국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실이다. 청나라 서태후가 집권한 1898~1900년 외세를 배격하는 의화단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8개국 연합 2만여명은 1901년 자국민과 공사관의 보호를 핑계로 베이징을 전쟁 개시 55일만에 점령했다. 당시 연합군은 일본 8000명, 러시아 4500명, 영국 3000명, 미국 2500명, 프랑스 800명이었다고 한다. 그때 러시아 군사들은 만주에 눌러 앉아 러일전쟁의 불씨로 작용한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해외진출에 대한 서구 열강의 관심이 떨어졌다. 이 틈을 이용해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차지한데 이어 1937년 베이징을 점령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도 입성했다. 일본은 난징에서 무고한 시민 수십만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강간했다. 광란의 일본인들은 '중국인 참수대회'를 열어 100명 이상을 죽인 두 명의 일본군 장교 사진을 마이니치 신문에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일본은1945년까지 중국인 1000만명 이상을 살육했다고 한다.
▶국제 정치관계는 냉엄하다. 강자 중심이다. 최강자만 어떤 수탈의 위기에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한미동맹국으로서 정치·경제 실리를 취했으나, 중국으로부터는 사드보복을 당했다. 중국은 미국 패권에 도전한 대가로 무역전쟁에서 호되게 당하고 있다. 이제 곧 무릎을 꿇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