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4] 고려 대각국사 '義天', 황해를 오가며 '해동 천태종'의 시조가 되다

 

▲ 혜인 고려사에는 의천 일대기를 담은 동판이 전시돼 있다. 특히 고려 왕자였던 의천이 국왕 몰래 김포에서 송상의 배를 얻어 타고 지금의 산둥성 밀주 판교진(板橋鎭)으로 밀항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 혜인고려사 장경각에 있는 대각국사 의천 화상

 

▲ 의천이 머물렀던 혜인고려사 입구,

 

▲ 혜인고려사 전시실의 신라·고려 고승들의 부조. 이곳에는 신라의 의상과 혜초, 백제의 현광, 고려의 의천과 범일 등 고승 20여명의 모습이 세겨져 있다.

 

▲ 류허탑에서 내려다 본 첸탕강과 항저우시의 모습.


항저우(杭州)는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다. 저장성은 중국 동쪽의 동중국해와 접하고 있는 성으로 해안선의 길이만 2200여㎞에 달한다. 항저우의 이름은 원래 첸탕(錢唐)이었다. 수나라 문제가 항저우라 고쳤고, 양제 시절에 징항(京杭)대운하의 강남지역 기점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항저우는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다. 오대(五代) 때에는 오월(吳越)의 수도였고, 남송(南宋)때에는 140여 년간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항저우는 옛날부터 물류의 중심지였다. 바다와 접하고 있는 해안이자, 운하를 통하여 내륙 깊숙이 화물을 운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항저우는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자 해상무역 업무를 전담하는 시박사(市舶司)까지 설치되었다.

고대 황해를 통해 항저우에 도착한 배들은 대부분 규모가 큰 배들이었다.

이러한 배들이 운하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항저우를 가로지르는 첸탕강은 항상 진흙이 쌓여 작은 배가 아니면 무거운 화물을 운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큰 배들은 강의 하류에 정박하고 작은 배들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화물을 수송하였다.

탐사팀이 첸탕강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더위가 숨을 턱턱 막았다. 강도 조망하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류허탑(六和塔)에 올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이겨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거대한 첸탕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는 작은 배들이 연이어 화물을 실어 나른다. 강을 잇는 다리를 빼면 남송 때의 풍경과 별반 다름없으리라. 하류 쪽은 강폭이 넓어 바다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니 과연 첸탕강은 저장성 제일의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이렇듯 거대한 첸탕강은 매년 음력 8월 18일경이 되면 무서운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오는데, 조수의 차이가 최대 9미터에 이른다. 류허탑은 이처럼 빠르고 거대한 강물의 범람과 피해를 막기 위한 염원으로 세운 것이다. 탑의 이름도 홍수를 막아냈다는 전설에 나오는 소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옛날에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첸탕강의 해일도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되어 매년 그때가 되면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항저우는 고려의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의천은 왕자의 신분으로 11살 때 승려가 되었다. 그는 승려가 된 후, 송나라의 화엄조사(華嚴祖師)라고 불리는 정원법사(淨源法師)와 화엄교리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 서신은 황해를 오가는 송상(宋商)들을 통해서 가능하였다. 이후 의천은 30살 때인 1085년에 송상의 배를 타고 항저우로 와서 정원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왕자 출신의 승려인 의천은 송나라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고승들과 두루 교유하며 화엄교리를 배웠다.

당시 정원법사가 있던 절은 927년에 창건된 혜인선사(慧因禪寺)였다. 의천은 귀국한 후, 스승에게 <금장경(金藏經)> 500부를 보냈다. 또한, 오래되어 낡고 퇴락한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창할 수 있도록 황금 2000 냥을 지원하였다. 사찰을 중창한 후, '고려사(高麗寺)'라고 고쳤다.

의천이 혜인선사에 머물 때 소동파도 항저우태수로 있었다. 소동파는 의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아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려의 승려와 관리들이 드나드는 것은 고려에는 이익이지만 우리에게는 손해만 된다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의천은 이러한 난관을 이겨내며 화엄교학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해동(海東)에 천태종을 개창(開創)하고 그 시조가 되었다.

의천이 머물렀던 고려사는 항저우가 자랑하는 서호(西湖) 근처에 있다. 소동파가 이곳 태수로 있으면서 쌓았다는 제방인 소제(蘇堤)를 지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올라가니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라고 쓴 사찰이 보인다. 바로 의천이 구법(求法)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대웅보전 앞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다. 석교 너머에는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에는 의천이 보낸 불경 등을 보관한 장경각이 있다. 대웅보전 옆의 전시실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소상(塑像)을 비롯하여 혜초, 원측 등 한중불교 교류사에 길이 남을 20여 고승들의 부조상이 있다. 그런데 의천의 소상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장씨(張氏)라는 사람이 근처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무너진 흙 담에 3일간 갇히게 되었다. 생사의 길목에서 금관에 중국옷을 입은 선인(仙人)이 그를 구해주고 사라졌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장씨는 절터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의천의 소상을 발견하고 그 선인임을 알았다. 그는 곧 10여 칸의 전각을 세우고 소상을 봉안하여 은혜에 보답하였다.

고려사는 18세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며 쇠락하였다. 청나라 때 황제가 친히 방문한 후에 법운사(法雲寺)라는 편액(扁額)을 내렸다. 이후 다시 잊혔던 고려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신건식이 사찰을 수리하고 '고려사'로 복원하였다.

2005년, 항저우시는 한중불교교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양국의 교류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사찰명도 의천과 정원법사가 연관된 '혜인고려사'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고려사는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원래 고려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이곳에서 태수를 지낸 소동파의 석상과 정자 등 기념물과 호텔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