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 부인 이은숙(1889∼1979) 지사에게 제73주년 광복절 행사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광복 후 73년 만이자 이은숙 지사 서거 39년 만이다. 너무 늦었으나 다행스럽기도 하다. 정부는 올해 이은숙 지사를 비롯해 3·1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6명과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선생 등 177명(여성 26명 포함)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했다. 정부는 지난 1년 간 여성독립운동가 202명을 찾았고, 그중 이번에 26명을 포상했다. 나머지 분들도 포상하겠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은숙 지사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08년 이회영 선생과 혼인했다. 결혼 2년 만인 1910년 남편과 함께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이미 이회영 선생은 1896년 항일의병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풍덕에 인삼농장을 운영했고, 만주 용정촌 '서전서숙' 설립에도 참여했다. 1907년엔 '신민회' 발족과 '헤이그 특사' 파견 등을 주도해 왔다. 1910년 12월 이회영 선생은 동생 시영(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등 6형제와 가족, 노비 등 40여 명의 일가족 전체 규모로 만주로 망명했다. 이 때 형제들은 전 재산(현 가치 약 650억원)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1911년 그들은 동포농민을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 산실이었다. 결국 그 많던 돈도 바닥을 보였다고 한다.
이은숙 지사는 자서전을 통해 "1919년 베이징 시절엔 돈이 없어 하루에 한 끼를 먹기 어려웠고, 한 달에 절반은 절화(絶火, 밥을 짓기 위한 불을 피우지 못함) 상태로, 생불여사(生不如死,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함)인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1932년 이회영 선생이 일제경찰 고문으로 중국 다롄에서 순국했을 때 이 지사는 "신선 같은 풍채를 한 그를 뵈었다"고 했다.
내년이면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이회영·이은숙 선생 등 독립지사들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통일과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 강국으로 발전해 나가길 다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