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디지털 기술의 진화에 반비례해 내 두뇌는 날로 둔해진다. 애써 머릿속에 가둬둔 기억조차 불러내기 어렵다. 덧셈뺄셈조차 감당 안 돼 곧잘 혼돈에 빠진다. 필요한 전화번호는 대부분 외우던 시절이 있었건만 흘러간 이야기다. 애초 길눈 어둔 '길치'는 아니었건만, 십 수 년 전부터 그 반열에 들었다. 핸들에 지도 한 장 걸치고 먼 거리를 누볐다는 얘기도 전설로 됐다.
책을 읽어도 돌아서면 남는 게 없다. 영감이니 감동은 잠시 뿐이다. 얼마 안 가 뭘 읽었는지, 뭔 얘기였는지 까마득하다.

이쯤 되면 험한 세상 헤쳐 나가기 어렵겠건만, 그럭저럭 견디고 있다. 부실한 두뇌 기능을 거드는 디지털 기기들 덕분이다. 누구나 그렇듯 전화번호나 계산 등은 스마트폰이, 길 찾기는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 책이나 신문, 메모, 자료 등 잡다한 콘텐츠 역시 디지털 장치에 가둬둔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내 기량 보단 낫다 싶다. 그러니 머릿속이 비어간들 별 걱정이 없다.

돌아보면 '길치'에 '숫자 맹(盲)' 등 증상이 나타난 건 정보기술을 만난 시점과 일치한다. 언제나 연결가능한 디지털 기술은 신세계였다. 이후 일상의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물론 기억조차 디지털기기에 아웃소싱(outsourcing)한다. 세간에 나도는 말처럼 일종의 '외장두뇌'다.
한데,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는 이런 외장두뇌의 위험을 경고한다. 외장두뇌가 단순한 저장장치에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여러 기술과 만나 나를 알아가고, 축적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나 자신(being-me)'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쯤 되면 내 생각과 의사결정까지 알아서 처리(?)해 줄 텐데, 축복 아닌 재앙에 가까울 거다.

레온하르트는 저서 '신이 되려는 기술'에서 기술이 몰고 올 재앙의 징후를 보여준다. 아울러, 오늘날의 급작스런 변화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만의 특성인 창의성과 상호성, 책임성, 연민이나 공감 등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묻는다, 그의 물음은 준엄하건만, 사색보다 검색을 즐기는 디지털 비만과 중독에 이미 빠져든 터이다. 이로부터 어찌 벗어나야 할지 고민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