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광복절에 생각하는 국가(國歌)·국기(國旗)     
[썰물밀물]광복절에 생각하는 국가(國歌)·국기(國旗)     
  • 김형수
  • 승인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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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파란만장한 근세사를 거쳐 광복 73주년을 맞이했다. 국가(國歌)와 국기(國旗)는 국민이 자연스럽게 합의한 결과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노골화한 일본의 식민통치는 토지와 미곡을 수탈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민의 착취에 앞장섰다. 개항을 전후한 일본의 침탈은 집요했다. 그 현장의 중심이 바로 인천이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 사건으로 다음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시점의 제물포는 세계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운양호 사건은 조선이 국기 제정을 제기하는 계기였다. 서구열강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열린 1882년 4월6일, 조선의 국기가 처음 사용됐다. 인천은 우리 국기를 사용한 최초의 도시다. 조미수호통상조약 5개월 후 제물포조약에 따라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다. 그가 탔던 메이지마루(明治丸) 호에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가 영국인 제임스 선장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고종은 이 때 제작된 태극기를 국기로 확정했다. 하지만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태극기는 지하로 숨어들어 여러 도안으로 변용됐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도 대다수 국민은 태극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늘날 태극기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지시로 국가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10월15일 국기제작법을 확정·발표해 탄생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국가는 없었다. 미국 국가만 연주됐다. 1896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등이 애국의 조목으로 국가제정운동을 펼쳤다. 고종은 서양음악 전문가인 에케르트를 기용해 1902년 7월1일부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어 반포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에 가사를 넣어 애국가로 불렀다. 1935년 11월 미국에서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후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가에 준하는 곡이 됐다.

광복절을 앞두고 지난 일요일 송도 트라이볼 공연장에서 대한제국 국가, 찬송가에 가사를 붙인 안창호 애국가, 일제강점기 애국가, 안익태 국가 등이 연주됐다. 인천콘서트챔버 이승묵 대표의 음악 해설과 역사학자 강덕우·강옥엽 박사가 인천의 근대사를 설명하는 토크 콘서트였다. 인천 역사 속에 숨겨진 당대 음악들이 현악기를 중심으로 풍금, 아코디언이 가세해 선보였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은 일본의 현대판 한반도 침략 야욕의 진행형이다. 민족의 정통성과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상징으로서 국기·국가에 대한 동의도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한반도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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