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7월20일(월)

 오후 2시30분에 「델게르머린」 강가에서 점심을 해 먹었다. 나는 며칠째 굶고 있다. 그래도 배는 고프지 않으며 활동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 신기하다. 오후 5시25분 큰 「오보」(고도 1,575m, 23℃)에 도착하니 저 멀리 「머런」시가 보인다. 오후 7시10분에 「머런」시(고도 1,275m)에 도착했다. 제일 급한 것이 휘발유를 급유하는 일이다. 휘발유 「메타」의 바늘은 0을 가리킨지 이미 오래다. 울란 바아타르에서 이 곳까지 1,755㎞를 달려왔다. 도로도 포장돼 있고 가로등도 있으며 횡단보도에 신호등도 하나 있으나 고장난지 몇 년은 된 듯 했다. 우리들은 갈 길이 바쁘다. 전신주를 따라 서북 방향으로 달려 올라갔다.

 밤 9시25분(고도 1,715m, 18℃)에 길가에 양을 모아놓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톱신·자르갈이 양을 한 마리 사겠다고 했다. 술을 주고 받으면서 흥정이 성립돼 ₩3,840에 한 마리 사기로 결정됐다. 양주인이 양무리 속으로 돌진해 잡으려고 하나 모두 도망가고 잡히지 않는다. 이번에는 우리의 톱신·자르갈이 제일 크고 살이 찐 놈을 잡았다. 마음대로 골라 잡고 한 마리 ₩3,840인 것이다. 이 가죽도 다음날 ₩7,520에 팔았다. 늘 양고기는 공짜로 먹고 있는 셈이다.

 이 살아 있는 양을 우리 차의 뒷의자와 앞의자 사이에 실었다. 그리고 박원길 박사, 치멕트·자야(여자 인민가수)와 내가 뒷의자에 앉았다. 박원길 박사가 양의 목을 껴안고 양의 궁둥이를 내가 무릎으로 밀고 치멕트·자야가 가운데서 양의 허리를 잡고 차는 달려간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양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앞으로 3일간의 식량인 것이다. 양은 정말 온순했다. 이 얌전한 양을 오늘밤 잡아 먹는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밤 10시5분에 뒤 왼쪽 타이어가 펑크났다. 곧 타이어를 교환하고 오늘밤 잘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몽골에서는 한 시간 앞을 알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밤 10시40분에 어떤 마을에 도착한 다음 정보수집부터 시작해서 트럭이 있는 집을 찾았다. 이곳은 「겔」이 없고 모두 나무집들이다. 주인은 「샤갈」(복숭아 뼈라는 뜻·28)이라는 장거리 트럭운전사였다. 처남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밤중에 손님이 들이닥치니 몹시 놀란 표정이다. 그것도 남녀 인민가수와 외국손님이 찾아왔으니 놀랄만도 하다.

 주인과 처남 둘은 술에 취한채 양을 잡기 시작했다. 술을 토하면서 양을 해체하는 동안 나는 전지를 두 개 들고 비춰주었다. 새벽 1시에 내장손질까지 마치고 곧 남녀 인민가수의 열린음악회가 시작됐다. 치멕트·자야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노래」와 「만도하이」를 부를 때는 많은 여자들이 울었다. 우리들은 새벽 2시30분이 되어서야 슬리핑 백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 곳은 전기가 들어와 있으나 오늘밤처럼 늘 정전이라고 한다. 98년 7월21일(화)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마을 이름은 「알락에르드네」(알록달록한 보석이란 뜻)라고 한다. 라디오에서 톱신·자르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톱신·자르갈과 치멕트·자야는 이곳에 남아서 자동차 수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우리들 셋은 소련군용 지프차를 전세내어 「헙스걸」호로 가기로 했다. 오전 11시40분 「알락에르드네」 마을을 떠나 북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운전기사가 길을 잘 알고 있었으나 길이 험하고 차는 낡아서 앉아있을 수 없다. 사방에서 비가 새들어와 피할 곳이 없다. 운전기사는 힐끗 쳐다보고는 미안하다는 듯 씩 웃는다.

 12시10분에 「하트갈」시 부근을 지나갔다. 이 곳은 「헙스걸」호의 물이 흘러나와 「에긴」강을 이루는 곳이다. 오후 2시15분에 첫 「오보」(고도 1,925m, 13℃)에 도착했는데 운전기사는 공구 한 개를 「오보」에 놓고 왔다. 오후 2시50분 「헙스걸」호의 「칭하이」(고도 1,645m, 13℃)에 도착했다. 이곳은 호수의 서쪽에 있는 휴양지이며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며 원대(元代)의 「코빌라이칸」이 이 지방을 청해(靑海)라고 지칭함으로써 「칭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헙스걸」호는 울란 바아타르에서 서쪽으로 800㎞ 떨어져 있으며 담수호로서는 몽골에서 제일 큰 호수이다. 호수의 폭은 60㎞, 길이는 135㎞, 물의 깊이는 283m나 되어 수량은 세계 담수(淡水)의 2%를 차지한다고 한다.

 물은 맑아 호수바닥까지 보이며 주위는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여름에도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며 6월까지 얼음이 얼고 있으나 녹기 시작하면 하루만에 얼음이 없어진다고 한다.

 러시아의 「바이칼」호에서 195㎞ 떨어져 있으며 이 호수의 물은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간다. 「바이칼」이라는 말은 몽골어로 「자연 그대로」란 뜻이다. 올해 「칭하이」를 찾은 동양인은 일본인 한 사람만 왔을 뿐이라고 한다. 사무실 아가씨는 3인분의 식사점표를 쓰는데 30분이나 걸려서 1시간 후에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길들여진 여사무원의 비능률적인 일처리 방법에 놀랐다. 서둘러 「칭하이」를 떠나 「알락에르드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20분이었으며 차는 말끔히 수리되고 새 타이어도 하나 구해 교환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헙스걸」호로 가기 전에 내가 생선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옆집 11세 소년이 50㎝나 되는 무지개 송어를 한 마리 잡아놓고 있었다. 갈 길이 바빠서 무지개 송어는 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몽골 사람들은 생선을 먹지 않는다.

 10분 후에 그 곳을 떠나 「머런」시를 향해 달려갔다. 밤 9시15분에 마주오는 차가 우리 차를 세운다. 독일인 한 사람을 포함한 일행 4명은 「헙스걸」호로 가는 길을 물었다. 오늘밤은 적당한 곳에서 자고 내일 찾아가라고 일렀다. 밤 10시5분에 「머런」시에 도착했다. 주유소에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휘발유를 넣을 수 있었다. 휘발유를 넣을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늘 신경을 써야 했다.

 어둡기 시작한 「머런」시를 떠나 초원을 동쪽으로 달렸다. 밤 10시30분이 지났을무렵 잘 곳을 찾아야겠다고 하며 가고 있는데 몽골 현지인의 여행자 「겔」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때묻지 않은 유목민의 「겔」에서 자고 싶었다. 톱신·자르갈이 여행자 「겔」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는 또 차를 몰고 떠난다. 뭐라고 물어 봤으며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으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는 천재다. 사막에 혼자 버려놔도 살아 남을 사람이다.

 이 곳에 얼마전 신혼부부가 이사(「겔」을 새로 만들었다는 뜻)왔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름을 아느냐고 하기에 모른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멀리 있는 「겔」의 사람들 이름도 서로 다 알고 있다. 여행자 「겔」 주인은 저쪽 다리를 건너 한참 가면 「겔」이 있다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그 곳으로 가니 「겔」이 있었으나 더 안쪽에 있는 「겔」에 갔는데 그 때는 밤 11시가 지난 때였다.

 톱신·자르갈과 치멕트·자야가 「겔」 안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나와 우리들을 들어오라고 한다. 어리둥절해 하는 부부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으니 젊은 부부는 말하기를 마침 치멕트·자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곧 이어 옆 「겔」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달려왔는데 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며느리의 말은 집에 있는 돈이 ₩300밖에 없다는 것이다. 술 인사가 시작되었는데 술잔 밑에 ₩150원이 받쳐져 있어 놀랐다. 이 것은 손님에게 노자(路資)돈으로 주는 것으로 여행에 보태쓰라는 인사다. 손님은 돈은 갖고 술잔은 주인에게 돌려주면 된다. 그새 돈을 꿔온 모양이다. 술 인사, 코담배인사, 식사까지 끝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너무 늦었으니 노래는 내일 아침에 불러주기로 하고 「슬리핑 백」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밤새 폭우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