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얼문화재단 주최 `역사기행""
-사라진 역사, 가야 영광을 찾아서-

“그리운 것은 돌아갈 수 없으매 더욱 그리웁다.”
한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이 옛것을 찾아 떠나는 것도
지난날에 대한 무조건적인 향수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곳에 가면 작은 풀벌레 하나,
아무 곳에나 피어있는 풀꽃 한송이도
우리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사라진 역사, 가야의 영광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지난 16~18일 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이 마련한
열다섯번째 새얼역사기행이 있었다.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한·일 관계에 냉기가 감도는 요즘,
국내에서 조차도 연구가 활발치 않은
`가야(伽倻)시대""의 유적지 답사는
묻힌채 조용히 숨쉬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새롭게 인식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그늘이 지지 않는다는 곳. 그곳에 가야인들이 제를 행하던 곳이 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 구석에 자리잡은 양전동 암각화였다. 고래가 새겨진 암각화 이후 71년 두번째로 발견된 이 암각화는 발견 당시 선명하던 것이 사람들의 도둑탁본으로 지금은 먹물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을 뿐 아니라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해와 신의 탈(가면) 모습으로 추정되고 있는 암각은 가야의 농사문화를 짐작케 한다. 가야인들은 이곳에 모여 신께 제사를 지내며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암각화는 현재 우리나라에 17~18개가 존재하는데 그 중 15개가 경상도에 존재한다는 이형기 학예사의 설명이다.
 다음으로 향한 곳이 대가야 왕족들의 위세를 짐작케 하는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다. `군""이라 불릴 만큼 이곳에는 고령의 진산이라 일컫는 주산(主山)에 산길을 따라 여러개의 고분이 존재한다.
 이 고분들은 1977년 폐분상태로 발견된 것을 발굴·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1천여기 이상의 무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고분마다 고유 번호를 매겨 구분짓고 있는데 특히 지산동 44호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이다. 이곳에서는 35개의 순장석곽이 확인됐는데 가야고분 중 최고위층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금귀고리 청동그릇 각종 토기 등의 유물로 보아 백제와 일본 고대국가와 빈번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이 발견되었을 당시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유물이 도굴된 상태였고 한술 더떠 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에 주차장을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그런 발상을 했다고는 하나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서서 역사적 유물을 훼손시키고 지워버리려 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속으로 난 길을 계속 올랐다. 마을 어귀에 더위를 식히려 나와있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이미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을텐데도 이런 더운 여름날 왠 손님들일까 하는 눈빛이다. 일행은 잘 정리된 논과 산이 맞닿은 길을 계속 올랐다. 영암사터를 가는 것이다.
 영암사터는 경남 서부의 가야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중간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다. 탁본으로 전하는 `적연국사자광탑비""의 비문을 통해 고려시대 이곳에 영암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특히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일제시대 왜인들이 밀반출했던 것을 탈환해와 6·25 이후 복원 재건한 것이다. 영암사의 회랑은 제법 넓었는데 이는 고려의 왕권과 불교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영암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 초까지 융성했다고 전한다.
 대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부처가 되기 위해 떠난 일곱명의 아들을 그리며 돌아가야 했던 영지(影池)를 지나면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나온다.
 퇴옹당 성철(1912~1993) 대종사의 사리탑은 언뜻 보면 잘 다듬어진 조각품 같다. 해인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에 놓여있지 않았더라면,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는 설명이 있는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누군가의 조각품이겠거니 하며 스쳐 지날 법하다. `자신을 바로 보라""는 화두를 던지기도 했던 성철종정의 사리탑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참배대 안에 자리잡고 있다. 크기가 각각 다른 정사각형 위에 놓인 반원은 활짝 핀 연꽃을 상징하며 반원이 받치고 있는 구 모양의 돌은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이다.
 해인사의 가장 깊숙이에는 고려 때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하며 만든 국보 제32호 대장경판이 있다. 모두 8만1천3백40장으로 돼있어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대장경판이다. 이 대장경은 고려 말과 조선 초 끊임없는 왜구의 노략질로 처음엔 강화에 소장돼 있다가 조선 태조 7년 이곳으로 옮겨져 수다라장과 법보전 동·서사간고에 나누어 안치됐다.
 새벽 사찰 방문을 끝낸 후 아침을 먹고 경상북도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청량사로 향했다. 청량산 연화봉 기슭에 자리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대웅전의 불상은 여느 사찰과 달리 돌로 만들어진 점이 특이하다. 또 석등과 삼층석탑, 전형적인 신라의 양식을 보여주는 두개의 보물이 있는데 이들은 대웅전의 석불과 일직선상으로 배치돼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석등과 탑의 모양은 팔각이다. `8""이란 수는 인도에서 많다는 의미란다.
 일본의 미야자키현에는 평화의 탑이 있다. 이 탑은 각국의 돌을 모아 쌓았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나 세계제패의 야욕을 담고 있다는 것이 동행한 윤이중 전 부평고 교장의 설명이다. 윤 전 교장은 “역사기행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새얼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대상을 차지한 류상현군(17·서울 양천고 2)은 “무더위 때문에 힘은 들었으나 백제, 신라와 달리 잘 알려지지 않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가야 문화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며 “유물과 폐허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유출해 낸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소감을 말했다.〈김희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