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논설위원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까를 고심하지만 죽은 자의 삶은 산 자로부터 되짚어진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하고, 죽는다는 것은 삶의 결과다. 결국 삶과 죽음은 동일한 어깨를 겨루고 있다.

고대 철학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몽테뉴는 '철학이 곧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주장한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사상에 시대를 뛰어넘어 동의했다. 죽음에 대비하는 철학적 사유와 가르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로 귀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합리주의자들은 철학의 본질은 죽음이 아닌 삶의 영역이라고 반전한다.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보면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죽음을 '영혼의 해방'으로 해석했다. 육체 안에 갇혔던 영혼의 자유로운 여행, 죽음으로써 영혼은 비로소 불멸의 세계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독배를 마시고 죽음 문턱에 들어서며 제자들과 나눈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플라톤의 <변명> '파이돈'에 기록됐다.

삶이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삶은 없으므로 삶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 없다는 불가지론을 주장한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죽음이 담고 있는 삶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실존철학자들은 참된 삶의 근본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강조했다. 야스퍼스는 죽음은 종말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상징으로 규정했다. 하이데거는 인간 자체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사유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고 극복해 나가라고 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정치 지도자의 자살소식은 사회집단의 권위가 단호하기 때문일까. 산 자는 개인과 집단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는 경우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자살은 생의 모든 의미를 상실한 상태다. 자살은 삶의 가치와 용기를 잃는 극단적 선택이다. 사마천이 절개를 지켜 사형을 받았다면 후세는 '절개'보다 '어리석음'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다. 비록 치욕적인 거세 궁형을 선택했으나 <사기(史記)>를 완성한 사마천의 굴기는 역사에 빛난다.
불가피한 자살이 있는가. 죽음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태다. 절망의 현실에서 희망을 선택하면 부모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생각하는 고귀한 삶을 다시 기약할 수 있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을까.' 공자가 자로의 물음에 답했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산 자의 위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