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해상실크로드의 중심 '경기만'] 1. 황해는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 중국 펑라이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의 잔해(위쪽).
▲ 사단항로의 집결지였던 닝보 보타산.
▲ 고대 황해 바닷길의 출발점인 산둥 등저우의 펑라이고성.

[인천일보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한반도·중국 주요 강, 황해로 흘러
신석기시대 부터 황해서 해상교류
중국유물, 우리나라 연안지역 출토

연안항로 육지·섬 따라 이동 바닷길
무역로·사절단 오가는 길·침공로로

횡단항로 연안항로보다 훨씬 빠른 길
신라, 中과의 외교·백제 공격에 이용

신라인 장보고, 청해진 설치 해적 소탕
막강한 군사력 … 황해 '해상무역' 장악
中 강남까지 직선 600㎞ 사단항로 개척



한반도와 중국에 둘러싸인 황해는 고대부터 동아시아의 지중해였다. 이는 두 나라의 지형적 특성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이고 중국은 서고동저(西高東低)형이다. 그렇기에 두 나라의 주요 강들은 대부분 황해로 흐른다. 도시는 강을 끼고 발생한다. 강 길은 황해와 연결되어 있어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황해에 이른다. 또한 황해에서 강을 따라 올라가면 도시에 도달한다. 이렇듯 황해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명의 허브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황해를 이용한 한반도와 중국의 해상교류는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있어왔다. 특히 중국의 춘추시대부터 한나라 시기까지의 유물이 우리나라 연안지역에서 드물지 않게 출토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는 조선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여서 육지와 섬을 따라 가는 연안항해가 일반적이었다. 황해의 연안항로는 중국의 산둥(山東)반도 등저우(登州)에서 출발하여 보하이만(渤海灣)과 랴오둥(遼東)반도 연안을 따라 압록강 하구에 이르고,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옹진반도와 경기만의 당은포에 도착하는 길이었다. 또한 더 남쪽으로 내려가 금강과 영산강을 지나고 남해안과 일본을 이었다. 이 항로는 가장 오래된 바닷길이었다.

모든 항로는 한 번 개척되면 다양하게 활용되기 마련이다. 연안항로는 고대로부터 무역로로 활용되었지만 사절단이 오가는 길로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침공로가 되기도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한 무제가 누선장군 양복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고조선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한나라 수군의 침공로가 이 항로였다. 나아가 수당시기의 수군들이 고구려를 침공한 것도 황해 연안항로였다.

서기 5·6세기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대립하고, 한반도는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가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며 해상을 봉쇄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선박을 나포하는 등 황해 연안에서의 항해를 방해하였다. 신라의 김춘추가 나당 군사동맹을 완수하고 돌아오다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죽을 뻔했던 것도 바로 이 때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뒤이어 백제를 기습하여 하류지역까지 점령함으로써 한강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로써 신라는 오랜 숙원이었던 황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진흥왕은 한강 하류지역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당은포(唐恩浦)를 대중국과의 직접 통교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곳은 오늘날의 화성시로 당시에는 한강을 통해 내륙과도 연결되던 해안의 요충지였다. 이때부터 당은포는 신라 제일의 대중국 출입관문으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한강을 차지한 후부터 증국과 적극적인 통교를 하였다. 한강을 차지하기 이전에는 200년간 총 5회에 불과했던 사신파견은 한강을 차지하고 약 100년간 총 42회로 늘어났다.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긴 고구려와 백제는 탈환을 위해 자주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성공할 수 없었지만 운항에는 많은 애로가 발생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방해가 없는 새로운 항로가 절실하였다. 이에 산둥반도와 당은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황해 횡단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횡단항로는 연안항로보다 훨씬 빠른 길이었다. 이는 그동안의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이 항로를 이용해 신라의 김인문은 수 차례에 걸쳐 당을 오갔다. 그리고 당 고종에게 백제 침공에 필요한 도로 현황과 진공로 등 각종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660년, 김인문은 소정방과 함께 산둥반도 성산에서 13만 대군을 이끌고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백제를 공격하였다.

황해 횡단항로는 7세기 전반에 신라인들이 중국과의 외교적 목적으로 개척하여 백제 침공로로 활용하였다. 당나라는 백제 침공이란 특급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왜의 사신을 장안에 억류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 항로는 일반적인 상용길이 되어 신라의 상인들이 이용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널리 활용되었다.

755년, 당나라는 제국의 황금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10여년에 이르는 안사의 난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하북과 하남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창장(長江) 남쪽 강남지역의 연해도시들은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며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창장 하구의 양저우(揚州), 저장(浙江) 하구의 닝보(寧波)와 항저우(杭州)는 당시 대표적인 무역도시였다. 황해를 무대로 각국의 무역업자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신라와 일본 등지의 견당사들도 자연스럽게 강남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를 타고 8세기 후반에는 황해에 해적들이 횡행하였다, 해적들은 해상에서 선박을 나포하고 상품을 빼앗는 것은 물론 신라의 양민을 잡아 노비로 매매하는 등 9세기 초까지 날로 흉포하였다. 신라인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군졸 1만 명을 하사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해적을 소탕한 장보고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강남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사단항로(斜斷航路)를 개척하였다.

사단항로는 중간 기착지가 없는 직선거리 600㎞의 항로다. 그야말로 고속의 바닷길인 셈이다.

하지만 조난의 위험성이 높은 길이기도 하다. 해상활동 경험이 많은 신라상인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추고 계절풍과 해류를 잘 활용하며 사단항로를 이용하였다. 장보고와 신라상인들은 당시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강남지역으로 몰려든 상품들을 신라와 일본 등지로 유통시켜 최대의 이윤을 올렸다.

황해 횡단항로가 외교적인 필요에 의해서 개척된 '사절단의 길'이라면, 사단항로는 경제적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개척한 '상인의 길'이었다.

하지만 모든 길이 그러하듯 사단항로도 이후 상인뿐 아니라 신라 견당사나 고려와 송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길로 발전하였다. 송의 사절단인 서긍은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고려를 방문하고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