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579년 어느 가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사명당이 서산대사 밑에서 공부하던 무렵이었다.
 사명당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를 모시고 어딘가를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떠날 때는 아침이었지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석양이 길게 비치고 있었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어느 마을 입구에 이르러 두 사람이 잠시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멀리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들에는 소 두마리가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한 마리는 검은 소였고, 또 한 마리는 붉은 소였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사명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두마리 소 중에서 어떤 소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까?”
 그동안 배운 주역점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스승과 은근히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산대사는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때 사명당이 괘(卦)를 짚어보고 나서는 “아마 붉은 소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 사명당이 득괘(得卦)한 것으로 보면 화괘(火卦)가 틀림없었고 火라면 붉은 색이니 붉은 소가 먼저 일어나야 맞는다.
 “선생님, 괘가 불인데 어떻게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납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으나, “그렇다면 좀 두고 보자. 어느 소가 먼저 일어나는지….”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검은 소가 먼저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사명당은 놀라서 스승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팔괘(八卦)로 본 것은 맞도다. 그러나 불이 붙으면 불꽃이 보이기 전에 먼저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법이거든.”
 똑같은 사물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물체나 사물을 어떻게 분석하고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철학의 영원한 숙제이며 아울러 역학의 영원한 과제이다. ☎439-0342
〈다음·주택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