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사회부 기자
'미투(Me Too) 운동'이 전국을 뒤흔든다는 표현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폭로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과제를 안긴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했던 작년 초와 비견할 만하다.
미투 운동도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치부됐다. 문화·예술계에서 폭로가 시작되자, 몇몇 점잖은 이들은 "원래 그 방면이 그렇다"고 비하했다. 하지만 차기 대선 주자, 유명 감독, 대학 교수, 문화계 인사, 언론인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폭로는 이어졌다.
이제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명백하다. 이제 우리는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암 덩어리를 캐내고 나아가야 한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정말 새삼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바바리맨을 본 적 있느냐, 성희롱 피해자가 된 적 있느냐, 특히 학창 시절 선생님이나 직장 윗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적이 있냐고 여성 동료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했다. 성범죄는 극소수 범죄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미투 운동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는 20대 초중반 연극판에서 조연출로 짧게 일했다. 연극거장 아무개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거장의 가면 아래에는 끔찍한 성범죄가 있었다. 아내는 진저리를 쳤다.

한 구석에 밀어뒀던 연애시절 기억도 떠올랐다. 10여 년 전 연극판에서 이름 있던 중년 남성이 각본을 봐주겠다며 아내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다지 친분이 없었고,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었는데 이상한 만남이었다. 아내는 그 사람이 껄끄럽다며 내게 멀찌감치 앉아 지켜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서울의 어떤 낯선 커피숍에서 상대 남성을 감시하던 내가 있었다.
아내는 지난 밤 성범죄자를 때려잡는 꿈을 꿨다고 한다. 사나웠던 잠자리 때문인지 퀭한 눈으로 내게 짜증을 냈다.

성범죄와 젠더(Gender) 권력 문제는 대다수 여성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다. 역사의 저편으로 흘러간 전근대적 현상쯤으로 치부했던 내 생각의 깊이가 얕았고, 아둔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