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의 건국

총애받던 왕건, 궁예 폭정 제압
혼인정책 펴 지방호족세력 포섭
936년 후백제 대파로 '삼국통일'

▲ 고려(KOREA)는 918년 건국해 올해로 개국 1100주년을 맞는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이후 474년 34대왕이 재위한 장기왕조였다. 고려왕조의 수도는 송악(개경)이었으나 1232년 거대제국 몽골이 쳐들어오자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간 강화도를 수도로 삼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려궁지를 살펴보고 있다.


2018년 겨울 아침, '고려궁지'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람들은 근엄한 대감의 몸태 같은 고건축물을 가리키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휴대폰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이 곳 고려궁지는 고려임금과 왕족이 살던 궁궐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1232년 이 곳엔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39년간 머물렀죠. 여러분이 서 계신 바로 이 터에 궁궐을 짓고 몽골에 항전한 것이지요."

무리의 리더격으로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설명을 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한번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그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 어째서 외규장각 건물만 있는 거죠?"
"아, 그건 고려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 궁궐을 부수었고, 훗날 그 자리에 정조대왕께서 외규장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덩그러니 외규장각만 있고, 허허벌판인 고려궁지에 서서 사람들이 겨울바람을 맞는다. 외규장각을 등지고 서자 강화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유물을 살펴본 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강화동종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려왕조가 강화로 천도하기 314년 전인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은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 4명의 장군과 함께 궁예의 왕궁을 습격한다. 군사 1만여명이 왕건의 뒤를 따랐다. 궁예의 부하로 총애를 받으며 2인자였던 왕건은 왜 자신의 주군에게 칼을 겨눴을까.

왕건은 20세 때인 896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궁예의 부하로 들어간다. 아후 고향 송악의 성주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한다. 898년 양주(楊州, 지금의 서울) 점령전투에서 전과를 거두지 못하는 등 왕건은 좀처럼 육상전에선 공을 세우지 못 한다.

왕건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해군대장군으로 후백제 견훤의 근거지인 나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부터다. 해상세력의 후예였던 왕건은 해상전에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왕건에게 915년 궁예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느냐"고 추궁한다. 왕건은 역모를 꾸미지 않았음에도 최응(898~932)의 귀띔에 따라 "역모를 꾸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허위 고백한 뒤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

앞서 궁예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자신이 '미륵불'이라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을 통해 폭정을 일삼는 중이었다. 신하를 비롯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철퇴로 죽였는데 급기야 왕비와 두 아들까지 의심해 살해한다.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로 치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쳐가는 궁예를 보던 왕건은 결국 918년 6월 궁예를 쫓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연호는 '천수'로 각각 정한다.

태조 왕건은 29명의 왕비에게서 34명의 자녀를 낳는다. 919년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긴 뒤 시행한 혼인정책의 결과였다. 왕건은 막강한 지방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호족들의 딸을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태조가 일단 유화정책을 펼치자 후백제의 견훤은 사신과 선물을 보내 축하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신라정벌의 야욕을 품고 있던 견훤은 고려와 일단 우호적으로 지낼 필요가 있었다.

견훤이 신라를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가 이미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신라사회는 이미 8세기 중반 소수의 진골귀족이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골귀족들은 아래로는 백성들의 피를 빨고 자기들끼리는 골육상쟁의 권력다툼을 벌였다. 신라말기 150여년동안 무려 20여명의 왕이 바뀔 정도였다.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나라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처럼 혼란한 상황에서 신라 왕의 후궁에서 태어나 비운의 어린 시절을 보낸 궁예가 초적을 찾아가 세력을 확장한 뒤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2강(후고구려, 후백제)1약(신라)의 시대가 시작된다.

본격적인 '3국통일전쟁'은 고려와 후백제가 먼저 시작한다. 사실 신라는 당시 있으나마나한 나라였다. 925년 조물성(경북 안동 상주 부근) 전투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고려와 후백제는 인질을 교환하며 화의에 들어간다. 그런데 견훤이 고려에 보낸 처의 친족 진호가 죽자 왕건이 보낸 사촌동생 왕신을 살해한 뒤 공주성을 습격한다. 그러나 발해유민들을 규합하며 병력이 막강해진 고려는 927년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며 승리의 고삐를 잡는다. 대야성은 경상도 요충지로 견훤이 애지중지하던 성이었다.

견훤은 화풀이라도 하듯 신라의 금성으로 진격한다. 이때 신라 55대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김부를 신라 56대 경순왕에 앉힌다. 후백제에선 이후 견훤의 후계자 문제로 다툼이 발생한다. 견훤이 장남 신검을 제쳐두고 넷째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하자 신검을 비롯한 반대파세력들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한다.

3개월 뒤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에 귀순해 충성을 맹세하고 때마침 신라의 경순왕마저 935년 왕건을 찾아가 항복을 선언한다. 936년 고려는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대파하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혼인정책과 함께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통해 지방세력을 자신의 사람들로 만든다. 사심관은 호족출신의 공신으로 출신 지역의 향리를 다스리는 관직이었다. 지방에서 반역이 일어났을 때 관리에게도 연대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한 데에서 시작됐다. 기인제도는 지방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수도에 머물게 하면서 출신지역에 관한 사무를 하던 제도이다.

고려의 건국이념은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다. 943년 태조가 세상을 떠날 무렵 측근세력인 박술희에게 시켜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한 왕실헌장이다. 훈요십조는 불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며 사원을 증축하라는 불교국가의 사상을 담고 있다. 왕위는 적자적손에게 물려주고 독립국가의 문화를 지키며 연등회, 팔관회를 개최하고 서경중시, 공정한 관리녹봉, 경전과 역사서를 읽을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는 이 훈요십조를 바탕으로 474년 34대 임금의 '장기왕조'를 이어나간다.

송악산의 눈이 채 녹지 않은 2018년 초봄. 고려궁지를 둘러본 사람들이 고려궁지를 하나 둘, 빠져나간다. 고려의 고도(古都)인 강화읍 관청리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 강화 승천포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의 전경.


[고려궁지 한바퀴]

성문 시간 알리는 '강화동종'
왕실 서적 보관한 '외규장각'

고려궁지(사적 133호)는 강화읍 북문길 42(관청리 743의1)에 위치한다. 고려 23대왕 고종임금은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의 권유로 1232년 도읍을 송도(개성)에서 강화로 옮긴다. 이후 원종11년(1270)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강화도를 도읍으로 삼고 지금의 자리에 궁궐을 짓는다.

고려왕조는 강화천도 뒤 개경의 궁궐과 똑같이 건물이 지어 사용했다. 북산이던 산 이름까지 개경의 뒷산인 '송악산'으로 바꿔 불렀다.

고려궁지엔 현재 강화동종(보물 제11-8호)과 복원한 외규장각, 강화유수부이방청(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유수부동헌(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5호)이 있다. '강화동종'은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을 알릴 때 치는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다. 종 꼭대기는 용무늬로 조각했으며 한국종의 특색인 음통이 없다. 조선 숙종37년(1711)에 제작한 종이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던 왕실도서관이다. 외규장각엔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을 보관했으나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불에 태우거나 약탈해갔다.

'강화유수부이방청'은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 가운데 하나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쳤다. 1층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강화유수부동헌'은 조선시대 강화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과 같은 의미다. 영조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당대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이 쓴 글씨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2중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꼴의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032-930-7078 /왕수봉 기자 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