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지정 무형문화재

이 영 만

 서양풍조에 밀려 잊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향토 곳곳에는 전통가락과 악기의 맥을 이으며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무형(인간)문화재들이 있습니다. 또 전통기법에 현대적 창의력을 접목시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수상자들, 장인들이 있습니다. 인천에 뿌리를 내리고 소리 없이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이들을 일주일에 한 명씩 소개합니다. 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영만옹(85ㆍ삼현육각(해금 대금 목피리 곁피리 장고 북)중 장고ㆍ인천시지정 무형문화재 제1호)

 『얼쑤! 허 좋~다, 얼씨구, 그렇지.』

 두 무릎을 장고삼아 탁탁 치며 내는 추임새에 힘이 있다. 듣는 사람도 장고소리를 듣는 듯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숨이 차고 거동이 불편해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는 팔순 넘은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이옹은 70여년을 장고와 살아왔다. 전국의 무슨 장단이고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옹은 장담한다. 『장단은 어렵지만 참 기가 막혀. 경기도소리, 서도소리, 남도소리 지역마다 노래가 다르듯 장단도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어. 소리꾼들이 소리를 할 때 장단이 바뀌는 구비구비를 알아야 명고수지. 장단을 맛나게 쳐주지 못하면 노래도 못해.』

 이옹의 「일고수 이명창」론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로 고수가 뛰어나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명창이 나온다는 것. 장고를 두드리며 중간중간 흥을 돋우는 추임새를 넣어 신이 나게 해야 소리꾼도, 듣는 이들도 하나가 된다.

 명창 박동진옹이 소리하는 중간중간에도 『형님, 어째 그리 장단을 잘 치시오!』하며 이옹의 뛰어난 장단에 감탄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 묵계월, 안비취, 김뻐꾹, 이은관 등 내로라하는 명창 옆에는 명고수 이옹이 있었다.

 안산이 고향인 이옹은 장고를 치던 아버지 권유로 북채를 잡기 시작했다. 10세때 쯤이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싫지가 않았다. 옹의 말대로 팔자였던 듯하다. 14살에 무대에 오른 이후 줄곧 전국을 누비며 우리 가락을 연주해왔다. 인천에 온 지는 20여년이 된다. 85년 10월 일흔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야 무형문화재 반열에 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태어나도 또 하고 싶을 만큼 좋은 우리 장단을 친다는 것 하나면 족하니까.

 아쉬운 것은 전수자가 없다는 것. 『2명이 배우겠다고 왔다가 그냥 갔어. 장단이 그렇게 어려운거야. 잘한다 하는 이도 가락이 왔다갔다할 적이 많은데….』 이옹의 표정이 어두워지다 요즘도 장고를 치시느냐고 묻자 금세 밝아지며 『오라면 가지. 지금도 힘차게 장단을 칠 수 있어』하며 또 무릎장단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