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이 잘 풀리면 3박자가 맞는다 한다. 그러나 불과 반년 사이 몰아쳤던 폭설, 가뭄, 홍수가 엮은 광란의 장단은 한과 아픔이란 불협화음을 남겼을 따름이다.
 연초에 하얀 눈이 내리는 낭만을 두고 환호하던 것도 잠시, 점차 피해 폭이 커지자 누구나 지겨워했다.
 그 뒤 이번의 불청객은 극심한 가뭄과 호우. 온 겨레가 목 타는 농심을 적셔 주고자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 양수기를 보냈던 터에 가뭄용 양수기가 다름 아닌 홍수피해에 동원되었다니 이보다 더한 역설이 어디 있겠는가.
 이래서 하늘의 지나침을 탓하기에 앞서 치산치수에 소임을 다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모자람을 깊이 뉘우치는 서두다.
 일찍이 공자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고 설파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따른다. 그의 두 제자(師·商)중 어느 쪽 인물 됨됨이 뛰어났는가를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師는 도가 지나치고 商은 모자라는 구만”, “그렇다면 師 쪽이 낫다는 뜻이옵니까”하자 “지나쳐 도를 벗어나는데 있어서는 설혹 그것이 좋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모자람과 다를 바 없다”고.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중용(中庸)을 염두한 것이다.
 굳이 `중용""의 사전 풀이를 옮기면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이 온당한 일,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은 일”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원칙을 이끌어 낼 최선의 방책은 우선 `치우침""과 `모자람""을 보완해 균형감각을 이끌어 내야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도의 국가경륜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에서 여·야 정치권이 일구어 내는 정치 이슈가 과연 민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유감스럽게도 핵심을 넘겨짚거나 모자란 구석이 없지 않아 새삼 중용정치가 아쉽다는 것이다.
 오늘날 명분이야 여하튼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관계는 정치권에 그치지 않는 모든 분야에 확산되고 있어 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선의의 경쟁풍토가 사라지고 말꼬투리 잡기에 세월가는 줄 모르니 이는 지식인 사회를 와해시키는 자해행위라 하여 과언은 아니다.
 공자의 일깨움이 시사하듯이 세상에는 완전인격이란 존재치 않는다. 사람이면 누구나 얼마간의 차이가 있을 망정 털면 먼지 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염치와 책임의식을 가늠하는 양심의 소재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핵심을 가림 없이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나을 법도 하다. 하지만 원칙을 살리는 지름길은 오히려 상대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상생(相生)의 틀에서 출발해야 득실에 앞서고 시민 또한 덜 식상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거듭 정치의 요체는 반목이 아니라 공생에 이바지할 공통분모 도출에 있으므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무조건 항복을 거두려는 일부 언행은 시민의 눈엔 그지없이 모자라 보인다.
 강조하거니와 방금 일련의 사태가 또 다른 민족 분열을 우려하는 까닭은 편가르기의 주체가 다름이 아닌 이 나라를 기동하는 각계각층의 브레인이라는데 있다.
 본질은 여와 야 모두의 주장이 유권자로 하여금 치우침 없는 공감대 형성에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가에 있지 않는가.
 가뭄속에 그토록 바라던 단비 마저 지나치게 내리니 짜증 나던 것이 바로 엊그제 보인 민심이 아니던가. 한 쪽에로의 치우침이 아니라 등거리(等距離) 선상에서 이루는 중용의 정치를 저버리면 아무리 열을 올려도 그 이상 거둘 것을 기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