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못미'는 잊어라 … 아쉬움 털고 '철의 여인' 재무장
▲ 소녀시절의 심상정 /사진제공=심상정 의원실
▲명랑쾌활소녀
심상정은 고양시 덕양구와 인접한 파주시 광탄면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둘에 언니 하나를 둔 막둥이 심상정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아빠와 엄마는 물론 고모 다섯 분의 사랑까지 듬뿍 받아 그런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중학생 시절엔 학생기자로 장효조·김재박 선수를 쫓아다니며 취재를 했던 열혈 야구팬이었고, 고등학생 시절엔 종로 '태화관'을 드나들며 영어회화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틈만 나면 친구들과 탁구장·볼링장을 누비고, 낙엽만 굴러도 까르르 웃음 터지던 '명랑쾌활소녀'였다. "내일은 또 누구와 무슨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이 전부였던 어린 시절의 심상정은 그저 세상이 즐겁고 사람이 좋았다.

▲사랑에 빠진 숙녀
"아들은 가르쳐야 되지만, 딸까지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집안 분위기 탓에 심상정은 어렵게 대입 '재수' 허락을 받고 서울대 입학이라는 꿈을 이뤘다. 미대를 다니던 언니를 따라 긴 생머리도 흉내 냈다. 당시 유행하던 짧은 스커트에 7㎝가 넘는 하이힐도 즐겨 신었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지만 풋풋한 사랑도 했다. 하지만 심상정의 평범한 삶은 거기까지였다. 심상정은 남다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책 '전태일 평전'. 이후 심상정에게 사랑의 대상은 '남자'에서 '사람'으로 바뀌었다. 스커트는 청바지로 바뀌었고, 하이힐은 운동화로 바뀌었다.

▲사람 사는 세상 위한 '철의 여인' 탄생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심상정은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을 체험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 13시간을 일하고도 월급은 고작 8만원, 그나마 3만원은 겨우 새우잠을 자는 벌집촌의 월세로 나갔다. 남은 5만원을 다시 쪼개 동생들 학비를 내야 했던 그들의 삶. 그 앞에서 역사선생님을 꿈꿨던 서울대학교 학생 심상정의 삶은 막을 내려야 했다. "이들이 제대로 존중받는 것이 진정한 민주화"라고 생각했다. 재봉사(미싱사) 자격증을 따고 공장에 취직했다.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람이 사람대접받는 세상을 위해 25년을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세상은 언제부턴가 이런 심상정을 '철의 여인'이라 불렀다.

▲요리 실력 뛰어난 아내지만….
데이트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34살에 결혼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가 됐지만, 그 시절에도 심상정의 러브스토리는 계속됐다. 대학로 건널목에서 마치 우연히 만난 것처럼 위장해 차 한 잔 마시고 다음 약속을 잡는 식으로 말이다. 결혼 후 남편은 말했다.
"아내가 꿈을 이룰수록 이 땅의 서민들이 꿈꿀 수 있다. 나의 역할은 내 아내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남편 덕에 심상정은 정치가로서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심상정은 요리를 좋아하고 아주 잘한다. 심상정의 소박한 꿈 하나는 정치가로서 소임을 다 마친 뒤 아내로서 엄마로서 마음껏 요리하고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물론 그전까지 남편이 기다려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엄마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10년간 수배를 받았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다. 배 속의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늘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고 농성도 해야 해. 네가 이해 좀 해주렴. 미안해 아가야."
태교는 늘 '미안해'라는 말로 끝나야했다. 아들 우균이가 4살이 됐다. 여전히 엄마 심상정은 지방을 돌며 노동운동을 해야 했다.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고 월요일 새벽에 살짝 일어나 나가는데, 아이가 소리도 못 내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지방 가는 내내 울었다. 그 이후로도 엄마 심상정은 항상 미안했다. 늘 바쁜 엄마의 빈자리가 미안했고, 엄마 없는 초등학교 졸업식이 미안했고, 엄마의 뒷바라지 없는 고3 수험생활이 미안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거짓말 안 하는 국회의원
2004년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 진출을 이루며 국회의원이 됐다. 심상정은 이전의 국회의원타과는 달랐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성역이었던 거대 재벌 삼성의 편법·탈법·불법 행위들을 당당히 파헤쳤다. '모피아'라 불리는 경제 관료들의 전횡을 밝혀냈다. 그리고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카드수수료 인하, 대형마트 입점 규제 등 서민을 위한 법안들을 거침없이 발의해 나갔다. 당시엔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심 의원이 발의한 법안들은 이미 실현되었거나 국민적 화두가 돼 있다. 심 의원의 진심 어린 의정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 가운데 심 의원이 가장 기뻐했던 상은 대학생들이 직접 선정한 '거짓말 안하는 정치인 5인'에 뽑힌 것이었다.

▲덕양구가 지켜준 '지못미' 심상정 열풍
17대 베스트 국회의원에 뽑힐 정도로 빛나는 의정 활동을 마감하고 2008년 총선에 나선 심 의원은 고양 덕양갑에서 채 5%도 안 되는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후보라 부르며 안타까움을 전해왔다. 씩씩한 심 의원은 밭을 탓하지 않는 농부의 마음으로 이 땅의 99% 서민들을 위해 다시 묵묵히 일했다. '정치바로 아카데미'를 만들어 바른 정치를 고민했고, 덕양에는 '마을학교'를 세워 바른 교육의 대안을 만들어 나갔다. 4년이 흘렀다.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바로 이곳 덕양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다시 나섰다. 2012년 4월 덕양 주민들은 170표라는 19대 총선 전국 최소 표차로 극적인 신승을 안겨주며 심 의원을 다시 국회로 보냈다.
지난해에는 정의당 제19대 대선 후보로 나서 6.17%의 득표율을 보이는 등 새로운 진보정당의 꿈을 펼쳐나가고 있다.
/최현호 기자 vadasz@incheonilbo.com